바다 위 근사한 정찬식사
몇 년 전, 동생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20일이 넘는 다소 긴 여행이었는데 초반부터 내가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나보다도 동생이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처럼 지하철 출구마다 친절하게 에스컬레이터 또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 아니니 숙소를 옮길 때마다 무거운 캐리어 두 개를 번쩍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수밖에 없었다. 또 살면서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는 두 자매는 20일 동안 거의 매 끼를 밖에서 사 먹어야 했는데 그게 또 보통 일이 아니었다. 미리 찾아 놓은 맛집 몇 군데는 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둘 다 길치였을 뿐만이 아니라 고삐 풀린 망아지들처럼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배가 고플 즈음에는 그 근처의 아무 곳이나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가장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지만, 그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우리는 딱 한 가지에 동의했다. “다음번에는 먹고 자고 배나 두드리는 여행을 하자”
그러고 보니 크루즈는 ‘먹고 자고 배나 두드리는 여행’을 꿈꾸는 자들에게 딱이다. 먹고 자고 배나 두드리고 있으면 어느새 새로운 기항지에 도착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크루즈가 정적이고 지루한 여행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크루즈의 매력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게을러도 되고, 또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하루를 온갖 액티비티로 꽉꽉 채울 수 있다는 점인데 그 와중에 ‘오늘은 또 뭘 먹어야 하나’, ‘저녁 식사 전까지 동선은 어떻게 짜야하나’라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신의 한 수이다.
크루즈에서의 식사를 논하면서 가장 먼저 소개해야 할 것은 단연코 메인 다이닝룸이다. 처음 크루즈를 탔을 때 이 거대한 3층짜리 다이닝룸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 해졌던 기억이 난다. 크기에 따라 놓인 반짝이는 글라스와 은빛 식기들, 잘 접혀서 접시 위에 올려진 새하얀 냅킨, 일주일 동안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해주는 친절한 전담 웨이터, 저녁식사 내내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 선상 다이닝은 크루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닝룸에서는 매일 메뉴가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긴 크루즈라고 하더라도 똑같은 것만 먹어서 질릴 걱정은 없다. 그러나 기본적인 고정 메뉴도 있기 때문에 특별히 좋아하는 요리가 있다면 매일 시킬 수도 있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순으로 하나씩 골라서 시키면 무난하지만 정해진 룰 없이 먹고 싶은 요리를 ‘마음껏’ 시켜도 좋다. 다이닝룸의 메뉴는 모두 크루즈 티켓 비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스타, 밥, 해산물, 각종 육류, 베지테리안 메뉴, 그리고 디저트만 해도 10가지가 넘으니 선택 장애가 올 수도 있다는 점.
다이닝룸이 아무리 크긴 하지만 3000명이 넘는 승객이 이 곳에서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통 크루즈에서는 저녁 식사 시간을 메인 시팅(main seating), 세컨드 시팅(second seating) 그리고 마이 타임 다이닝(my time dining, 예약제)으로 나눈다. 메인 시팅은 보통 6시, 세컨드 시팅은 8시 또는 8시 30분부터 시작한다. 식사 시간은 크루즈를 예약할 때 함께 선택할 수 있는데 일행과 같은 테이블에 배정되길 원한다면 미리 요청을 하는 것이 좋다. 일단 테이블 배정이 되고 난 다음에는 시간이나 테이블을 바꾸는 것이 복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인 시팅은 너무 빠르고 세컨드 시팅은 좀 늦다 싶으면 마이 타임 다이닝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워크인 스타일이라고 보면 되는데 기본적으로 원하는 시간에 다이닝룸에 가서 비어있는 테이블을 안내받는 것이다. 메인, 세컨드 시팅은 크루즈 기간 동안 같은 테이블을 이용하며 같은 웨이터의 서비스를 받는 것이고 마이 타임 다이닝은 일반 레스토랑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콘셉트는 그러하지만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인기가 많은 7시, 7시 반에 예약을 하지 않고 방문했다가는 노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게 될 수도 있으니 크루즈 전에 원하는 시간을 전체 예약을 걸어놓는 것을 권한다.
메인 다이닝룸에서 식사 시간이 하나의 옵션이라면, 그다음 옵션은 테이블 타입을 고르는 것이다. 연인 또는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프라이빗 테이블을 요청하면 되고,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싶다면 쉐어링 테이블을 선택할 수 있다. 커다란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세계 곳곳의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매력이다.
다이닝룸에서 꼭 지켜야 하는 매너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의 제일은 바로 식사시간을 잘 지켜 입장하는 것이다. 6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메인 시팅 승객들이 식사를 마치면 웨이터들은 재빠르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세컨드 시팅 승객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니 다이닝룸 정찬을 원한다면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게 테이블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애피타이저-메인-디저트가 차례대로 나오는 정찬 식사를 여유 있게 즐기려면 보통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셰어 테이블을 예약했다면 다들 메인 요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혼자 애피타이저를 먹는 민망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또 하나 지켜야 할 것은 웨이터에 대한 예의다. 다이닝룸 웨이터는 단순히 음식을 주문받고 갖다 주는 종업원이 아니다. 이들은 크루즈 기간 내내 담당 승객들의 이름은 물론, 식습관이나 특이사항까지 세밀하게 기억하는 크루즈 서비스의 일등공신들이다. 뿐만 아니라 승객의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초를 꽂은 디저트를 들고 나타나 노래를 불러 주는 등 깜짝 이벤트를 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적절한 팁을 주는 것은 격려의 의미에 앞서, 적절한 예의를 갖추는 방식이다. 물론 대부분의 크루즈 라인에서는 서비스료(gratuities)가 크루즈 가격에 포함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확인 후 원한다면 팁을 추가로 낼 수도 있다.
마지막은 드레스 코드다. 사실 이 드레스 코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크루즈가 호화 여행이었을 때부터 크루징을 즐겨온 실버세대들은 턱시도와 칵테일 드레스를 차려입고 즐기던 정찬 식사의 전통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크루즈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대중적이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현대적인 여행으로 바뀌고 있기에 크루즈의 분위기도 이에 맞추어 젊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래서 다이닝룸이나 라운지에서도 자유롭게 반바지를 입고 싶어 하고 격식에 얽매이는걸 싫어하는 승객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드레스 코드가 의무 아닌 선택 사항이 되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이닝룸에서만큼은 스마트 캐주얼룩 정도는 입어 주는 게 관례다. 포멀 나잇이 아닌 날이라도 다이닝룸에서는 반바지나 모자 차림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
Written by Hong
@jayeon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