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계속되어야 한다
크루즈에 처음 승선했을 때 유독 휠체어나 스쿠터를 탄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서 놀랬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 걷기가 힘든 노인분들이거나 장애인인 경우이다. 프런트 데스크, 레스토랑, 면세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릴 때마다 그들이 시야에 잡혔다. 그래서 처음 며칠은 어리석게도 “미국에는 장애인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우리나라, 내 주변에는 장애인이 별로 없는 게 아니라 그들이 일반인들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구축이 안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역으로 크루즈에 유독 휠체어나 스쿠터, 또 나이가 드신 분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크루즈가 그들에게 쉬운 여행이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 Open Doors Organization and U.S. Travel Association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국 인구의 10%가 크루즈 여행을 해보았고 지난 5년간 미국 장애인의 12%가 크루즈 여행을 했다는 통계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크루즈 안의 장소 곳곳은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최대한 불편함이 없도록, 또 소외되지 않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이 ‘장애인을 위한 배려’라기보다는 권리의 개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동등한 사회생활 영위를 위해 제정된 미국 장애인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of 1990)의 효력은 크루즈에서도 빛을 발한다. 화장실의 자동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라운지와 바, 다이닝룸 등 크루즈 안의 모든 공간에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는 것은 기본이다. 극장과 아이스링크의 관객석에도 진입이 편한 자리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반드시 마련되어있으며 승선과 하선 시에도 도움을 받는다.
승선일에는 터미널에 휠체어 도우미들(Wheelchair assistant)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승선(priority boarding)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하선일 또한 지정된 장소에서 휠체어 도우미들이 하선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까지 휠체어 이동 서비스를 제공한다. 단, 크루즈에서의 휠체어 도우미들은 사실 크루즈의 각종 부서에서 근무하는 일반 직원들이며, 정해진 시간에 지정 장소에서 휠체어를 미는 업무를 제외한 리프팅(승객을 일으키거나 들어서 휠체어에 앉는 것을 돕는 것)을 돕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또한 환자 이동과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승객의 개인적인 요청으로 한 지점으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크루즈 여행기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휠체어를 제어하거나 함께 여행하는 동반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크루즈에서 휠체어나 스쿠터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내 소유의 것을 갖고 타는 방법이다. 승선하는 항구 주변에 살고,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사실 일주일치 짐 가방과 함께 교통수단을 갈아타면서 항구까지 와야 하는 사람에게는 선뜻 내키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그러니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승객들은 크루즈사와 계약을 맺은 전문 렌털업체를 통해서 휠체어나 스쿠터를 예약한다. 대표적으로 Special needs at Sea그룹이 있다.(https://www.specialneedsatsea.com/) 이런 경우 크루즈에서는 명단을 확인하고 승선일에 객실로 휠체어와 크루즈를 배달해둔다. 크루즈 기간 동안 이용하다가 하선일에는 그대로 객실에 두고 나오면 되기 때문에 쉽고 간편하다.
객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선사와 배의 크기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크루즈에는 일반 객실이 있고, 장애인을 위한 객실(Accessible room)이 있다. 겉으로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일단 엘리베이터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고, 일반 객실과 비교했을 때 문의 너비가 10인치 정도 넓기 때문이다. 또한 문지방이 없어서 휠체어가 편하게 드나들 수 있으며 객실 안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사로 역할을 하는 램프가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과 샤워실 안에는 핸드레일이 갖춰져 있고, 혹시라도 급하게 도움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하여 비상전화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객실을 둘러보면 인사이드 룸(Inside room 발코니나 창문이 없는 방)의 경우라도 휠체어가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넓으며 휠체어의 높이에 맞춰서 옷장이나 문의 손잡이, 싱크대도 기준보다 낮게 설계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세부사항은 선사마다 라인마다 다르다. 그러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배의 크기가 크고, 건조된 지 얼마 안 된 새 배일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 가릴 것 없이 더 편리한 방향으로 설계되고 디자인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면 포트 데이(port day 기항지에 정박하는 날)에는 어떨까?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기항지를 안전하게 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타깝지만 '기항지마다 다르다'이다. 선사 측에서는 여러 가지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그중에 휠체어를 탄 승객도 참여 가능한 투어들이 여럿 있다. 크루즈 여행의 특성상 고령자의 비율이 많다 보니 많이 걸을 필요가 없이 버스를 타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투어도 마련되어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제약이 있다. 예를 들면 스쿠터의 크기가 너무 크지는 않은지, 휠체어의 종류가 접이식인지, 또 휠체어에서 내려서 버스에 올라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서도 참여할 수 있는 투어의 범위가 달라진다. 물론 투어에 참여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기항지에 다녀오는 경우는 또 다르다. 포트에서 시내까지 거리가 먼 경우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4대 중 한 대는 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ADA 버스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든 기항지가 같은 것은 아니니 개별적으로 확인을 해보는 것이 안전하다.
언젠가 한 번은 승객이 쓰던 스쿠터를 대신 반납해주기 위해 스쿠터를 타고 크루즈 안을 돌아다녀본 적이 있다. 스쿠터에 올라타고 핸들을 잡으니 익숙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눈높이부터가 달라졌고, 시야도 내 발로 걸어 다닐 때와는 달랐다. 엘리베이터가 만원은 아니었지만 스쿠터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서 처음 한 대는 그냥 보내야 했다. 그러니 크루즈를 탄다고 해서 일상의 불편함이 모두 해소되는 정도는 아닐 것이며 주변 이들의 배려도 분명 필요하다. 그럼에도 여러 번 옮겨 다닐 필요 없이 짐을 한 번만 풀면 된다는 것, 또 한 곳에서 오락, 여가, 식사 등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육지 여행과 비교했을 때 훨씬 편안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Written by H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