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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Apr 02. 2024

흰 겨울

한강, 『흰』

온 세상이 흰 날이 있었다. 모양도 크기도 균일하지 않은 눈덩이들이 대각선으로 날리고, 하늘에 흰색이 말갛게 스며 있고, 눈 위에 서리가 내려앉아 서걱이고, 푹푹 걸어가는 소리와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화성을 이루고, 사람이 지나간 길 주변으로 눈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해 겨울의 첫눈이었다.     


그리고 겨울을 좋아하던 누군가의 기일이었다. 겨울이 되고자 했던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만서도, 이런 식으로 첫눈이 온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대상 없는 원망이 묻어났다. 완벽할 만큼 조화로운 겨울 풍경에 허망했다. 변함없이 돌아오는 계절과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삶. 지나가버린 시간과 재연될 수 없는 과거 앞에서 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흰 숨은 흰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여전히 그는 세상에 없었다.     


그래도 나아가야 했다. 그가 좋아했던 겨울로, 내가 좋아하는 겨울로. 우산을 가지고 나오려던 마음을 접고, 단단히 목도리를 정리하고, 커다란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눈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_한강, 『흰』 中 진눈깨비


계절은 지나가고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바뀌어 한 줌도 채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마저 짧은 생을 살다 스러질 것이니 당연하다. 삶이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호의적이라기보다는 광폭하다는 사실이, 그 앞에서 우리는 성실히 먹고 자고 웃고 슬퍼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우리의 끝은 정말 죽음이라며, 언제나 유서를 품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며 친구와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잔인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떠나버린 이들과 떠나고 싶어 하는 이들을 떠올린다. 자살에 의한 죽음과 사고에 의한 죽음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설령 매우 다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어떤 위안이 되는지 물어 본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애도의 자리에는 슬픈 부재가 남는다.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은 채, 마치 공백 자체가 존엄이라는 듯이 하얗게 비워진 자리가.     


“그러니 만일 아직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

_한강, 『흰』, p.117

  

죽음은 흔적을 남긴다. 나의 삶이 그 흔적에 존립한다고 느낀다. 그들의 죽음 위에 내가 서 있다는 감각. 내가 될 수 있었던 무수한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다. 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는 섬뜩함, 어쩌면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죄책감, 마치 그것들과 무관한 듯 살아갈 수 있다는 수치심 사이에서 방황한다. 떠나간 이들이 남긴 파문 위에서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밀린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계속해서 생겨나는지, 앗아진 삶의 가능성을 과연 누가 책임질 수 있을지, 삶의 광포함과 사회의 잔인함을 두려워한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계속해서 울고 이따금씩 울고 까먹을 때쯤 또 운다.      


실시간으로 침몰하던 배를 기억하고, 잇따라 삶을 등진 연예인들을 기억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보호받지 못했던 삶들을 기억하고, 자유로운 날 외출했다가 빼앗긴 청춘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서로 책임을 회피하며 사과하기를 끝내 거부하던, 그렇게 죽음을 방치하던 어른들을 기억한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이들이 남아 있다. 부재는 존재보다 강력하고 트라우마는 찬란한 순간보다 지속적이어서 그 모든 기억은 그들과 함께 영속한다. 나는 그들 곁에 선다. 그들만큼은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진다. 그래도 살았으면 좋겠어요, 라고 절박하게 속삭인다.     


죽음은 침묵과 함께 간다. 어떤 죽음은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것은 생사를 입에 올리기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의 언어화 불가능성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적인 목적에 따른 비겁함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마지막은 죽음을 납작하게 눌러버리고 애도를 통한 기억의 재생을 막아버린다. 죽은 자에게는 입이 없으니 그대로 침묵하라며 죽음에 서려 있는 목소리를 지워버리고, 죽지 않은 자에게는 당사자성이 없으니 또 침묵하라고 한다. 죽음이 현실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애도는 개인적으로 조용히 처리해야 한다는 빌어먹을 불문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슬픔은 설 자리가 없다. 울음은 강요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발화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죽은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세계가 있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에서도,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그는 떠나간 이들에게 마이크를 건넨다. 그는 『흰』을 쓰면서,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게 삶을 빌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과거로부터 도래할지도 모를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들의 언어는 희다. 흰색 물감을 덧바르고, 하얗게 지워낸 시공간에 그들의 말이 도착한다. 하얗게 비워진 자리에서 과거가 되어버린 삶과 현재의 삶이 이어진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_작가의 말 中

  

실체의 옷을 입은 흰, 실체로서의 흰은 정말 하얄 수 있을까.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하얀색으로 빛날 수 있을까. 한강 작가의 흰은 모든 것을 받아내고 모든 것을 지워낸다. 침묵으로 묵묵하게 삶을 닦아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하얀 것이라기보다는 고통, 절망 등 모든 것을 품어낼 수 있는 ‘오염에도 불구하고 흰 것’이어야 한다. 불순물이 아무리 많이 섞여 있더라도 결국에는 흰 것, 여러 색깔의 빛이 모여서 만들어 내는 결국에는 흰 것, 잘못 그은 선을 박박 지워서라도 나타나는 결국에는 흰 것. 시간의 테두리를 넘어 당도하는 것들은 희다. 희게 슬프다.     


이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당신의 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흰 숨으로 얽혀 있다. 내가 내뱉은 입김이 당신의 들숨이 되고, 당신이 내쉰 한숨이 나의 숨이 된다. 그렇게 나는 당신의 일부가 되고 당신은 나의 일부가 된다. 이제는 다한 숨이 당신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겨울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진 숨들을 생각한다. 크게 들이마신 숨에 비해 미약하게 떨리며 나왔을 한숨들.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삶의 편린들. 사라진 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이 흰 겨울 속으로 자취를 감춘 것 같다는 인상,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남겨진 이는 막연히 상상할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다만 당신이 부재한 지금,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한강, 『흰』, p.135)     


흰 풍경의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흰 눈을 맞는다. 축축해진 발이 시려오고 뺨을 타고 물이 흐른다. 온갖 잡음을 머금은, 죽음을 닮은 눈의 침묵 속에 웅크린다. 그러나 그곳에 당도하는 시간 너머의 흰 목소리. 중첩된 삶과 죽음은 이내 흰 숨이 되어 피어오른다. 뽀얀 숨을 땅에서 뿜어내며 남겨진 자들을 생으로 끌어올린다. 흰 겨울은 그렇게 우리의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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