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해 Jul 17. 2023

물과 바람

기꺼이 부서지기

1.

가만히 서있는 발 아래 흐르던 물이 고이고, 그 물이 썩어 진창이 된다. 진창 속에 발을 담그고 멍하니 바라본다. 그저 흐르고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던 물도 작은 틈새로 고이다보면 썩는다. 땅을 무르게 만들고 발을 무겁게 만든다. 물이 지나가길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물이 지나갈 길을 만들고 고인 물에서 발을 빼야 했던 것이다. 물이 지나가든 내가 물을 피하든 둘 중 하나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구나. 왜 발이 축축할까, 이 축축함이 언제 가실까, 축축함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도 발이 썩어 문들어지기 전까지만 유의미한 것이구나. 왜 하필 여기에 물이 고여 있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바닥이 깊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썩은 발을 잘라내거나 고인 물을 정화하거나 뻘을 사막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우니, 가만히 바라보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일단, 진창에서 발을 빼내야 한다.



2.

빈껍데기. 안에 무엇도 들어 있지 않은 버석한 껍데기. 버석해서 바스라질까 애써 포장해서 다닌다. 알맹이가 없음을 들켜서는 안 돼, 스스로 인정해서는 안 돼, 사무치게 느껴서는 안 돼. 가까스로 외면하고, 자기기만으로 포장하고, 나름대로 괜찮다며 덮어 버린다. 이 껍데기가 바스라지면 다시는 복구될 수 없으니. 부서지지 않도록 껍데기 위에 갑옷을 두른다.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버석한 껍질 사이로 바람이 밀려 들어와 틈을 벌린다. 코 끝을 간질이는 실바람만으로도 틈은 속수무책으로 커진다. 벌어진 틈은 눈을 질끈 감아 외면할 수 있는 작은 틈새가 아니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커다한 빛과 바람. 그렇게 껍데기는 작지만 큰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가벼운 것은 날리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는다. 비행과 흩어짐은 가벼움의 특권이다. 잘게 부서진, 따라서 더이상 홑겹이라 부를 수 없는 껍데기의 부스러기를 바람 위에 얹는다. 바람과 함께 바다 너머로 흩어진다.


무거워질 수 없다면, 알맹이를 가득 채워넣을 수 없다면, 아예 가벼이 흩어지는 게 낫겠다. 그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지. 산뜻한 바람과 기세좋은 파도에 맡겨보자. 파도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파도와 바람의 존재 그뿐. 그 앞에는 어떤 무력함도 무가치함도 없다.


빈 껍데기를 남기고 변태한 나비가 될 수 없다면. 부서지고 흩어진 자리에서 바람을 따라 부유하기. 가벼움의 특권을 누리기. 기꺼이 바스라지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