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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tween time Aug 15. 2019

엄마 미국은 있잖아

남편이 미국으로 이직을 준비할 때 옆에서 가장 큰 독려를 했던 이는 바로 나였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외국에서의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나는 그랬었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어땠을까. 엄마에게 나의 미국행은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일지 생각하지 못했었다. 좋은 기회를 잡은 거니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딸이 미국으로 떠나는 것은 이제는 엄마 곁에서 언제든 가까이 볼 수 없는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처음에 엄마는 좀 두려워하는 것 같았고, 그다음엔 모든 것이 걱정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물어보곤 했었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미국에서 살기 힘든 건 아닌지, 미국에서 한국음식 먹을 수 있는지 등등


한국을 떠나올 때까지 나는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사람 사는 곳 다 비슷비슷하다고 대충대충 둘러댔었다. 일일이 답변하기 바빴고, 엄마의 끝없는 걱정에 조금 짜증도 났었다. 그렇게 못난 모습으로 엄마를, 한국을 떠나왔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내가 얼마나 무심한 딸이었는지, 내가 한국에서 너무 무심하게 해서 벌 받는 건가 싶었다. 드디어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낯선 타국 땅에서의 생활이.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운 일인지, 걱정되고 무서운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가고 매일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짐을 싸는 내내 엄마는 옆에서 수세미와 행주부터 수건, 옷걸이, 비누, 반짇고리 등등을 챙겨줬다. 나는 미국 가서도 살 수 있다고 말렸지만, 엄마는 내가 어디 아프리카에 마트 없는 곳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걱정에 나는 더는 말리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짐을 풀다 보니, 당장 급하게 고무장갑을 가지고 청소를 하다가 요리를 하다가 이래서 엄마가.. 목이 메는 순간들이 문득 많아졌다. 집에 필요한 살림을 살 때도 짐을 꾸밀 때도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 몰래 많이도 울었다. 너무 무심하게 떠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는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한국에 자주 들어올 건데 라고 생각했다. 떠나와보니 알겠다. 괜히 2억만 리 타국 땅이 아니라는 것을. 막상 언제 다시 한국에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한국에 휴가로 간다는 것도 현실에서는 쉽지 않았다.


엄마와는 시차 때문에 전화통화를 하기도 힘든데 그건 내 생각이었다. 엄마는 밤낮없이 내 전화만 기다렸고, 언제든 새벽이라도 전화벨이 울리면 전화를 받았다.


엄마에게 나는 걱정 없이 잘 지낸다고 아무리 말해도 엄마는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엄마는 미국을 몰랐다. 한국 이외에 다른 해외는 나가본 적도 심지어 여권도 없었다. 요즘 해외여행이 그렇게 흔한데 나 혼자 다닐 생각만 했지 엄마랑 같이 여행 한 번을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걱정을, 마음을 안심하기 더 힘든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 한국에서의 내 못난 행동들을 반성하면서 최대한 엄마 눈높이에 맞춘 설명을 시작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게. 매일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지 않게.


처음에는 내가 요리한 음식을 사진 찍어서 보내주고, 꾸민 집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결혼 후에도 엄마가 거의 살림을 많이 도와주셨다. 밥도 거의 내가 해먹은 적이 없으니 나도 정말 왜 그리도 철이 없었는지.)


그리고 내 활동을 엄마에게 소개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니고 있는 ESL 수업에 대해서 우리 동네에 있는 동사무소에서 열리는 한국으로 시집온 외국인 신부들에게 한국어를 무료로 가르쳐주는 한국어 학당 같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라는 땅에 여러 이유로 살게 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곳. 우리나라 동사무소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학당 같은 곳. 엄마는 제법 이해한 것 같았다. 나에게 늘 영어학당에 잘 다녀왔냐고 물었다.


그리고 미국에 봉사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한국보다는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든 할 수 있으며, 사회활동의 일종으로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였다. 엄마는 나처럼 게으른 애가 봉사활동 같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셨지만 나는 이 봉사활동을 통해서 미국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1번만 가기 때문에 큰 부담 없는 활동이라고 엄마에게 설명했다.


또, 미국은 너무 비싸서 경제적으로 힘든 거 아닌지 늘 돈이 없는 건 아닌지 집세(월세)를 내고 나면 쓸 돈이 부족한 건 아닌지 걱정이 많았다.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생활물가는 한국보다 훨씬 더 저렴하고, 외식하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여유 있게 살 수 있다고 알려줬다. 예를 들어 계란이 12개에 1불(1,200원)이고, 우유는 2리터에 4,000원 정도라고.


세탁기는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사용했고, 건조기는 있지만 잘 쓰지 않고 주로 베란다에 나가서 빨래 건조대를 사용했다. 미국에서 베란다에 빨래 건조대가 펼쳐져 있으면 그곳은 한국인이 사는 집일 거라고, 우리 아파트에서 보면 몇 집 한국인이 사는 집이 보인다고 얘기해줬다.


전화의 첫마디가 늘 "밥은 먹었니"로 시작하는 엄마에게 주변에 한인식당이 많아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육개장, 짬뽕, 김밥,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등등 가끔 음식 사진을 찍어서 보내기도 했다. 엄마는 육개장이 맛있냐고 맛이 나냐고 물었다. 엄마에게 고사리까지 넣어준다고 했더니 미국에 고사리도 있냐며 신기해했다. (물론 나도 육개장에 고사리까지 올라온 것이 너무 신기했다.)


한국에서 겪는 불편한 문제를 얘기하면서 안심시키기도 했다. 미세먼지가 심각했던 올봄에는 미국에는 미세먼지가 뭔지 사람들이 모를 정도로 미세먼지가 없고, 밤에 산책할 때는 공기가 좋은 덕분에 반딧불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보다 훨-씬 살기 좋다는 점을 무궁무진 강조한다.


그렇게 엄마랑 통화할 때마다 엄마를 안심시키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늘 걱정뿐이다. 그래서 내가 엄마에게 걱정할 거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게 신기하다고 하다고 말하곤 한다.


이제 겨우 미국에 온 지 5개월이 되었다. 짧다면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엄마와 나는 여전히 통화가 끝날 때면 눈물바람이다. 안 울기로 매번 다짐을 해도 엄마 목소리 엄마 걱정하는 얘기를 들으면 왈칵 다시 눈물이 나곤 한다.


내 눈물은 아마도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완벽한 마무리를 하지 못해서 인 것 같다. 갔다가 금방 돌아올 것처럼 생각했으니 엄마도 나도 아직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는 것 같다.


엄마에게 미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 지 말해도 엄마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녹록하지 않고 많이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더 좋은 점을 찾아서 엄마에게 알려준 다는 것을.


엄마 있잖아 미국에서의 삶이 엄마의 걱정만큼 힘들지는 않아. 한국에 있었어도 꼭 이만큼은 힘든 일이 있었을 거야. 그래서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어. 여전히 엄마와의 통화 때마다 눈물이 나는 건 내가 한국에서 엄마에게 못했던 일들만 떠올라서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 엄마에게 내 미국 생활이 조금은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곤 해. 그러니까 엄마 이제 걱정을 조금 줄여도 돼. 내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하다고 했잖아 나는 엄마 지금 여기에서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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