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원피스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고민한다. 이번 주에 입지 않았던 옷 중에서 오늘의 날씨에 어울리는 옷을 떠올려 본다. 상의를 고르면 하의의 선택지는 줄어든다. 나에겐 동료들이 지어준 별명이 몇 개 있다. 패테(패션 테러리스트), 존 레넌(단정하지 못한 헤어스타일) 등등. ‘스타일’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남의 차림새에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옆자리의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면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에 인사 대신 질문을 던진다.
“오늘은 데이트 없나 봐?”
딱히 대답이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가장한 평가들. 사실 남들에 비해 미적 감각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나도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동을 받고 흥이 난다. 새 옷을 차려입은 날이면 평소보다 당당하게 걷기도 한다. 내가 가진 블라우스에 어떤 스카프가 찰떡으로 어울릴지 안다. 나에겐 그 아이템들이 없다. 없으면 사면된다. 간단하다. 다만 남들보다 의류에 지출할 돈이 부족하다. 정직원보다 연봉이 적고 집에 갚아야 할 빚도 있다. 이 무렵의 나는 매일매일 엑셀 파일을 열고 가계부를 적었다. 출퇴근 교통비를 제외한 하루의 지출 0원이 목표이기도 했다. 출근을 하면 탕비실에는 회사에서 조식으로 준비해준 김밥과 샌드위치가 있었다. 김밥은 일찍 떨어졌기 때문에 김밥을 먹기 위해 출근을 더 서둘렀다. 야근을 하면 야근 수당 플러스 구내식당에서 석식이 제공되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목표였다. 짠순이가 패테를 벗어나기 위해 옷과 구두를 살리 없다. <매일 같은 옷을 입는 사람이 멋진 시대>라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다. 아예 출근복을 지정해 놓고 혼자서 유니폼처럼 같을 옷을 입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냥 패테라고 인정해버리면 마음이 편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의 스타일이 좋다. 자꾸 눈길이 간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완벽한 오피스룩 스타일링을 마주한 날이면 내 옷차림이 평소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진다. 그런 날이면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지하상가를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다. 예쁘고 인기 좋은 옷은 이미 팔리고 남은 세일 하는 옷 중에서 고심한다. 포카리스웨트의 파란색 민소매 원피스. 옷을 사러 가면 나는 보통 원피스를 선호한다. 상하의 두 벌을 사는 것보다 가격도 저렴한 경우가 많고 옷을 입을 때도 위아래를 맞추기 위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 체형은 상체가 빈약하고 다시 말해 가슴이 작다. 상체에 비해 골반이 큰 편이다. 허벅지는 얇고 종아리가 두꺼운 편이다. 팔뚝에도 살이 많은 편이다. 팔다리가 가늘었다면 좋았을 텐데. 소매에 퍼프가 있고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디자인의 롱 원피스를 입으면 내가 가진 체형의 단점이 많이 가려진다. 친구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나는 원피스를 끝없이 사서 원피스 된장녀가 될 거라고. 하늘 아래 같은 원피스는 없다.
어제 새로 산 원피스를 꺼내 입니다. 지하철과 사무실에선 에어컨 바람 때문에 한여름에도 얇은 긴팔 가디건은 필수다. 특히 민소매 원피스라면 더욱더. 아무리 찾아도 하얀 가디건이 보이지 않는다. 세탁기에 들어가 있는 걸까?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또 지각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원피스와 같은 색의 가디건을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이 구역 패션 테러리스트가 된다. 가디건을 새로 하나 더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