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았던 한 마디
02년에 대학생이 되면서 산소 학번으로 불렸다. 뜨거웠던 여름엔 누구나 붉은 악마가 되었다. 나도 축구 경기를 함께 응원하기 위해 광화문 바닥에 앉아 “대한민국”을 외쳤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신촌의 한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다른 카페보다 시급이 조금 높았던 그곳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떠올리게 하는 원피스를 입어야 했다. 알바와 함께 나의 첫사랑도 시작되었다. 큰 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의 동그란 코와 도톰한 입술에 내 눈길이 자주 머물렀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그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공강 시간이 겹칠 때면 점심을 함께 먹었다. 시간이 맞지 않을 때는 일부로 시간을 맞추기도 했다. 그날도 함께 점심을 먹고 캠퍼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며 건널목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는 질문했다. “대통령으로 누구 뽑을 거야?”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통령 선거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에게 이 질문의 대답이 굉장히 중요했고 그 대답으로 인해 우리의 관계과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대충 대답했다. “후보들 모두 별로야.” 나의 대답에 그의 표정과 말투는 달라져있었다. “ 그 사람들도 다 너 안 좋아해.” 모른다는 말이 면죄부가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어른은 부끄러움 뒤에 온다고 했던가. 더 이상 모른다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부끄러운 순간을 잊고 싶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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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서 작가가 되는 에세이 쓰기 2기
김은경 작가 수업
25분 글쓰기. 2021.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