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일 년 정도 살았던 그 집은 서울의 한 달동네에 올려져 있었다. 엄마는 내가 8살이 되기 전에 서울로 돌아가려고 이사할 집을 알아보았다. 자식을 서울의 학교에 입학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7살과 2살 아이를 키우면서 수원에서 서울로 집을 알아보러 다니던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급할 땐 잘 아는 것, 익숙한 것에 의지하곤 하지 않던가. 외가가 있는 동네로 이사를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우리 가족이 사용하는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을 지나 마당 통과해 직진하면 주인집이었다. 우리 집은 대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조금만 걸어가면 나왔다. 디딤돌과 같은 계단을 한 칸 올라서면 나무 테두리에 유리가 달린 4짝의 미닫이문이 있었다. 그 문이 우리 집의 현관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거실 겸 주방이었다. 바로 싱크대가 보였고 그 왼쪽엔 냉장고가 있었다. 다시 왼쪽엔 방문이 있었다. 하나의 큰 방은 중간에 미닫이 문으로 나뉘어 두 개의 방처럼 보였다. 주방에서 부모님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내 방을 거쳐야 했다. 내 방은 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나의 책상과 책장이 있었고 모퉁이를 돌아 옷장이 있었다.
나는 잠귀가 밝은 편이었다. 하나의 방이나 다름없는 그 방에서 미닫이문을 닫고 엄마와 아빠는 싸웠다. 8살인 나는 그 소리에 깼고 3살인 내 동생은 곤히 잠들어있었다. 싸움의 소리는 점점 커졌다. 부부싸움이 길어질수록 나의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그 생각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저렇게 싸우다가 헤어지는 건 아닐까? 엄마와 아빠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할까? 엄마가 아빠와 같이 살지 못하겠다며 집을 나가 버리면 어쩌지? 나는 엄마를 따라나서야겠다. 그 시절의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이불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책가방을 챙겼다. 엄마를 따라 집을 나가더라고 학교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방에 시간표와 상관없이 모든 교과서와 공책과 필통을 챙겼다. 필통 속에는 아빠가 곱게 깎아준 연필도 들어있었다. 여차하면 집을 나갈 작정이면서 하다못해 양말 하나, 팬티 하나를 챙길 생각을 못하던 나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조용히 책가방을 챙기는 일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 가방을 메고 엄마의 손을 잡고 새벽의 골목길로 나선 적은 없었다. 가방을 꼭 쥐고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소리를 들으며 상황을, 승자와 패자를 파악해야 했다. 절정을 지나 부부싸움이 소멸되고 나면 침묵이 찾아왔다. 완전한 승자도 완전한 패자도 없었다. 그래서 싸움은 반복되었다. 더 이상 인기척이 나지 않을 때 나는 다시 수업시간표에 맞춰 가방을 챙기고 이불로 돌아갔다.
싸움이 유독 격렬했던 어떤 밤이 있었다. 아빠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내 방을 지나 부엌으로 나갔다. 부엌으로 따라 나온 엄마를 식칼로 위협했다. 꺼내진 칼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냉동고 문에 꽂혔다. 방에 있던 나는 그 상황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지만 소리로 짐작할 수 있었다. 상상하는 세계는 어쩌면 현실보다 더 잔인했을지도 모른다. 냉동고 문을 찌르고 빼고 다시 찌르고 반복하면서 아빠의 화는 사라졌을까? 다음에 자신을 또 화나게 하면 냉장고가 아닌 너를 찌를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가족을 위협하고 싶었다면 그건 성공했다. 나는 아빠가 두려웠다. 화가 난 아빠의 눈. 쌍꺼풀이 짙은 큰 눈이 더 커지면서 그 눈은 마치 이성을 잃은 짐승의 눈과도 같았다. 아빠의 그 눈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빠에게 맞서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냉동실 문에 내 옷장에 붙어있는 것과 같은 디즈니 스티커를 붙였다. 신데렐라와 호박마차. 냉장고를 새로 살 형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칼에 찔리고 스티커가 붙여진 냉동실은 여전히 제기능을 했을까? 내 머릿속에서 스티커가 붙은 냉장고의 이미지는 냉동되어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 기억은 공포이기도 했고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커갈수록 내 아빠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어쩌면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웠다.
이옥섭 감독과 구교환 배우는 서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창피함이 없어요." 소울 메이트란 이런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 20대 초반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다. 첫사랑부터 시작해서 나의 연애 역사를 모두 알고 있는 친구. 내가 얼마나 지질하고 쿨하지 못했는지를 알면서도 나를 깔보거나 가볍게 대하지 않았던 친구. 아이를 낳고 모처럼 혼자서 연희동에서 그 친구를 만난 날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스티커가 붙은 냉장고까지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친구에게 나의 공포와 부끄러움에 대한 기억을 꺼내놓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가족이 교자상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화가 난 아빠가 식칼을 꺼내와 교자상에 꽂은 이야기. 그 이야기는 우리 아빠만 그런 폭력적인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을 주었고 친구가 보인 태도는 내 공포감을 쪼그라들게 했다. 친구는 아빠의 행동에 겁을 먹기는커녕 아빠를 놀려댔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 그때의 상황을 꺼내며 아빠의 어리 석인 행동을 놀린다고 한다. 친구야 너는 어떻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상황을 잘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었던 거니? 어떻게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거니? 그런 성향은 타고나야 하는 걸까?
결혼 전에 남편에게 경고했다. 어떤 상황이든, 무슨 일이 있던지 나를 한 대라도 때리거나 힘으로 굴복시키려 한다면 무조건 경찰을 부를 거라고. 엄마가 된 지금은 덧붙여 아이들이 보고 듣는 앞에서 싸우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