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결혼기념일이 다가온다. 시댁과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살게 된지는 만 4년이 넘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댁 가까이 살게 되면서 장점도 단점도 있었다. 가까이 살다 보니 시댁에서 자고 오는 일이 없다. 설날 하루의 시작도 시댁에서 보낼 때보다 늦어졌다. 시부모를 뵙고 함께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만남의 빈도는 전보다 크게 늘었다. 일주일에 몇 번 시부모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적당한 지에 대한 의견 차이로 남편과 다투기도 했다. 시댁에서 보내는 시간이 불편하다. 아마도 그 불편함은 평생 나와 동행할 것 같다. 결혼 초반에는 시부모와 가까워지기 위해 내 나름의 노력도 해보았다. 시부모와 함께 하는 여행을 계획했고 남편과 나의 근황을 전하며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다. 나를 낳아준 부모에게도 살갑지 않고 말도 많지 않은 편이라 내 딴에는 노력을 했다고 했는데 시부모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나도 더 이상 무리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시댁에 가면 인사를 드리고 나면 입을 닫는다.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 옆에서 그저 도울뿐이다. 다 같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침묵이 어색해서 못 견딜 즈음엔 아이들의 최근 성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은 시어머니가 맺는다. 감기에 걸린 아이에게, 밥을 먹지 않고 군것질을 하는 아이를 보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매번 같은 처방을 내리신다.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고 집에서 데리고 있어 봐라. 그럼 괜찮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지 결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또 그 결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이어서 나는 다시 입을 닫는다. 그러니 몇 년이 지난다 해도 시부모와 내 사이가 가까워질 리 없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아이들은 TV를 보고 있고 남편도 소파에 앉아 아이들을 눈으로 좇고 있다. 시아버지는 방 침대에 누워서 저녁을 기다리신다. 저녁이 다 차려진 상황에서 나는 큰 아이에게 말한다. 할아버지에게 가서 식사하시라고 하라고. 이 상황, 이 대화가 무척 익숙하다. 어린 시절 파주 할머니 댁에 가면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을 내가 내 아이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이런 행동이 자식을 나의 아바타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시댁에서 보내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고 또 그렇게 유도하고 있었던 거다. 겨우 이 정도로 자식을 아바타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 게 지나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 자그마했던 행동들이 계속 반복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나의 경우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엄마 지금 공항 가는 길이야. 큰 이모랑 같이 미숙이 있는 발리로 가고 있어. 다음 주 수요일에 올 거야. 아빠한테 네가 얘기 좀 잘해줘."
미숙 언니는 큰 이모의 둘째 딸이다. 프로그래머인데 업무를 위해 발리에서 거주 중이다. 큰 이모는 연세가 많으셨고 해외여행 경험이 없었다. 언니는 이모를 발리로 초대하고 싶었지만 이모 혼자 성남에게 발리까지 장거리 이동이 어렵다고 생각했고 나의 엄마에게 여행 경비를 모두 부담하는 조건으로 함께 동행하기를 제안했다. 엄마는 여행에 대한 정보를 공항 가는 길에 전화로 나에게만 통보했다.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울 생각을 하면서 가족 누구에게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왕 가게 된 여행 집 걱정은 말고 즐겁게 보내고 오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나버린 엄마 때문에 화가 날 아빠의 기분을 살피고 대응하는 역할은 나의 몫으로 떠넘긴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한 집에 사는 가족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마치 007 작전과 같은 여행을 떠난 엄마.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짐작이 가긴 한다. 아빠는 엄마의 여행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다. 여행 이야기를 꺼낸 시점부터 여행을 떠나는 순간까지 엄마는 아빠의 눈치를 보았을 테고 부부싸움을 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는 여행을 못 가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여행이 꼭 가고 싶었고 그래서 독단적으로 행동했을 테다. 엄마가 여행에 가 있는 사이 내가 아빠의 기분을 살피고 식사도 잘 챙겨 준다면 아빠의 화가 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일단 여행을 다녀오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뭐 그런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마치 “여행은 내가 갈게! 살림은 누가 할래? 딸!”이라고 말한 거나 다름없었다.
엄마의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나는 불안했다. 아빠에게 엄마의 여행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엄마를 생각하면 살림을 맡아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경우 화가 난 아빠와 한 집에 있는 건 나였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엄마가 없는 일주일 동안 나는 아빠의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애를 썼다. 하루는 된장찌개를 끓여보았고 또 어떤 날은 잡채를 만들어 보았다. 평소에 잘 만들어 먹지도 않던 잡채를 왜 만들어 보고 싶었는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요리 신생아가 잡채에 도전하는 건 무리수였고, 팬에서 볶아진 잡채는 고무줄을 씹는 것처럼 딱딱했다. 내가 만들었지만 나조차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퇴근하고 돌아온 아빠는 아무 말없이 남김없이 다 먹었다.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던 것 같다. 아빠는 엄마를 대신해 보려는 내 노력을 알았고 나는 아빠가 그런 내 노력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걸. 잡채가 맛있는지 맛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는 유야무야 넘어갔다. 엄마가 원하던 대로 나는 아바타 미션을 완료했던 거다. 엄마는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듯 점점 더 나를 아바타로 부렸다. 엄마가 나를 아바타로 생각하지 않다면 나에게 먼저 여행 계획을 이야기하고 엄마 대신 살림을 맡아 줄 수 있는지 물었어야 한다. 그리고 “싫다”는 대답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억지로 떠넘긴 일도 결국은 맡아준 나라면 미리 이야기하고 엄마가 얼마나 여행에 가고 싶은지 그 마음을 전달했다면 나는 기꺼이 엄마의 여행을 돕는 조력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모녀의 세계>를 집어 들고 읽게 되어 다행이다. 머리에 경고등이 켜졌다. 아바타를 대물림할 수는 없다고. 내가 좀 더 나를 관리 감독할 필요가 있다고. 20대 초반에 친구와 함께 친구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친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어디서 들었는데 아니 읽었나? 아무튼, 사람이 가진 단점은 3대에 걸쳐 이어진다고 하더라. 엄마가 가진 단점을 나도 똑같이 물려받았을 거야.” 그때의 나는 친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들이 가진 단점은 증조할머니부터 시작된 거라고 생각해. 그럼 증조할머니-할머니-엄마로 끝이야. 나는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