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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Apr 26. 2022

마음의 탄성

3월부터 새로운 유치원에 다니게 된 딸이 적응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달 동안은 하원하고 나면 유치원에서 활동이 재미있었는지, 뭘 배웠는지 질문을 했다. 딸은 그때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답하기 귀찮을 때 딸은 보통 잘 모르겠다고 한다.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유치원에서 보낸 시간은 재미있었다고 하니 그거면 되었다. 4월이 되면서 하원한 아이에게 질문하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엄마 유치원에서 속상한 일이 있었어."

하원 버스가 떠나자마자 딸이 말했다. 알파벳 시험을 보았는데 5문제 중 4문제를 틀려서 선생님이 주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곧바로 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같은 반 친구들은 받았어?"

한 친구는 다 맞았고 또 한 친구는 2개를 틀리고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선물은 토끼 말랑이.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장난감이다. 마치 젤리처럼 말랑말랑해서 손으로 쥐면 구겨졌다가 탄성이 좋아 손을 펼치면 다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간다. 이미 집에 있는 장난감이지만 아이의 입장에선 새 장난감이 또 받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친구들만 받고 딸은 받지 못해 속상했겠지. 아이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줘서 고마운 한편, 시험을 잘 보지 못해 속상하다는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나도 역시 마음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비싸지 않은 장난감을 내가 대신 사줄 수도 있지만, 엄마가 사주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시험 못 봤다고 속상해하는 마음보다 다음번 시험은 잘 봐야지라고 생각해보자."


작년 여름부터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운동을 시작하게 된 지인과 나를 비교하기 된다. 타고나길 운동신경이 좋지 않으니 남들보다 빠르게 실력이 늘기를 바라기보다 꾸준히 연습을 하는데 집중하자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레슨을 받으면 머리론 알겠는데 내 몸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육아를 하며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한다고 하고 있는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나의 몸놀림에 스스로 실망한다. 그런 나를 다독여서 다시 연습장으로 보내는 것도 나다. 내 운동실력이 늘지 않아 속상한 마음보다 아이가 시험을 잘 보지 못해서(선물을 받지 못해서) 속상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훨씬 더 마음이 아리다.


얼마 전 동생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다가 어렸을 때 엄마에게 맞았던 이야기가 나왔다. 동생이 중학생 때 태권도 학원을 3일 동안 무단결석했다고 한다. 엄마는 결석 1번에 100대를 맞아야 한다고 했고 300대를 맞아야 하는데 반으로 갂아서 150대를 맞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뭐? 150대를 한 번에 다 맞았다고 그게 가능해?"

동생이 덧붙여 말하길 매를 때리는 엄마의 손에서도 피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엄마에게 가장 많이 맞은 날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중간고사를 본 후였다. 전과목 시험지를 확인하고 틀린 개수대로 엄마에게 맞았다. 부끄러우니 정확한 개수는 비밀로 하고 싶다.


시험을  보지 못한 중학생 딸을 때리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속상했을까, 화가 났을까? 그때의 나는 엄마가 무서워서 시험을   봐서 속상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없었고  스스로도  마음을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무엇을 하든 남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남들보다 잘하지 못하는 나로 인해 괴로워한다. 경쟁심보다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함께 노력해 나아가는 과정을 즐길  있는 마음을 어떻게 하면 아이와 나에게 알려줄  있을까? 좋지 않은 일을 겪고 쪼그라진 마음에서 다시 원래의 나로 차오를  있는 탄성을 가질  있게   있을까?


아이가  번째 시험을 앞둔 저녁. 우연히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함께 읽는 영어 그림책(ANIMAL BABIES LIKE TO PLAY) 알파벳에 관한 책이었다. 딸과 나는 함께 책을 읽었고 아이는 연습장을 꺼내 알파벳 대문자를 써보더니 소문자도 알려달라고 한다. 아이는 손으로 쓰고 입으로 소리 내보고 눈으로 보며 기억하려고 애쓴다. 연습장과 동화책을 덮고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면서 딸이 이야기한다.

"난 시험이 싫어!"

이제 시작인데, 앞으로 좋든 싫든 수많은 시험을 앞두고 있는 딸이 벌써부터 시험을 싫어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게 걱정이 된다. 걱정은 꼭 잔소리로 이어진다. 시험은 그냥 그동안 배웠던 내용 중에 알고 있는 걸 답하면 된다고. 아이는 다시 말했다.

"그럼 선물 못 봤잖아!"

"그까짓 선물 못 받으면 어때!”

그러면  된다는  알면서  아이에게 정색하고 있다. 남편은 엄마와는 다르게 아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줬다.

"아빠가 사줄게."

남편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한다. 아이가 시험을  봐서 받을  있는 보상을 부모인 우리가 매번 대신 채워줄 수는 없다. 만약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지만) 대학입시 시험을 망쳐서 가고 싶은 대학을   없는 딸에게 우리가 대학합격증을  수는 없을 테니까. 우리가   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일뿐이겠지. 기대하는 결과에  치친 결과로 실망한 아이를 혼내기보단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을  있게 필요한 도움을 주고 싶다.


우리 엄마는 시험을   중학생 딸을 어쩜 그렇게 무섭게 혼내고 때릴  있었던 걸까? 엄마도 속상한 마음에 다음 시험은  노력하라고 선택한 방법이 체벌이었을까? 지금 딸에게 그까짓 선물  받아도 된다고 말하듯 중학생의 나는 그까짓 시험  도 뭐 어떠냐는 태도를 보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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