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아, 학교 졸업하면 무슨 일 하고 싶어?”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빠르게 보랏빛으로 깊어졌다. 한 번쯤 내가 졸업한 캠퍼스를 한중과 나란히 걸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캠퍼스의 언덕을 오르내리다 학생회관 앞 가장 큰 벚나무 아래 자리 잡았다. 나는 건물 입구의 돌계단에 앉았고 한중은 내 오른편의 계단 난간에 한 팔을 올리고 기대어 서 있었다. 27살의 우리. 나는 이미 졸업해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한중은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게 뭘까 궁금했다.
“라디오 PD”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생각인지, 한중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나와는 다르게 하고 싶은 일을 확실하게 품고 있는 네가 평소보다 빛나 보였다. 일교차가 큰 날씨라 그럴까, 돌계단이 차가워서인지, 네가 좋아서인지 몸이 조금 떨렸다. 고개를 들어 한중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한중의 꿈을 알고 나니, 그러면 나는 네 곁에서 라디오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중의 머리 위로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33살, 낙엽이 인도를 빼곡히 덮던 날,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오전 7시 34분. 출근 준비로 분주했을 시간이지만, 침대에 누운 채 TV를 켰다. 아침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뉴스를 보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새로운 소식을 취재해 온 리포터는 한중이었다. 이게 현실일까, 잠이 덜 깨서 꿈꾸고 있는 걸까. 나는 핸드폰을 켜고 내가 아는 그 한중이 맞는지 검색했다. 라디오 PD를 꿈꾸던 27살의 한중은 리포터가 되어 있었다. 라디오 작가를 꿈꾸던 나는 여전히 회사원이었다. 아니, 지금은 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방향은 조금 달라졌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한중을 보니, 같은 자리를 맴도는 내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6년 전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꿈이 떠올랐다. 라디오 작가가 되어야겠다. 작가가 되고 싶어. 출근하고 퇴근하며 반복되는 하루.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하는 동안 시간을 빠르게 흘렀고, 하고 싶은 일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사이 꿈은 마음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작가가 될 수 있다고 깜빡거렸다. 침대를 빠져나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백팩을 꺼내 툭툭 털었다. 가방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에너지바를 꺼냈다. 백 퍼센트 충전된 노트북을 전원 케이블과 분리해 가방에 넣었다. 집 밖으로 나가자. 도서관에 가야겠다. 꼭 라디오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다. 앞으로도 길을 잃을 때마다 26살 봄의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꺼내 봐야지. 그 시절의 꿈은 등대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다. 이제 내 곁에 너는 없지만,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