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계절

by 이나은

나는 후드티이다. 빛깔은 회색, 지퍼가 달려있다. 2002년 봄, 나는 세상에 나왔다. 백화점 3층 여성복 매대. 옷걸이에 걸려 있던 나를 그녀가 발견해 주었다. 그녀는 대학 신입생처럼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그녀를 따라 강의실에 가곤 했다. 외투 없이도 괜찮은 날씨였기에 그녀가 보는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나는 주로 봄과 가을에 활동했다. 날씨가 추워지거나 더워지면 옷장에 머물렀다. 가끔 장마철에도 그녀는 나를 찾았다. 그런 날엔 그녀 대신 비를 맞았다. 그녀가 나를 고른 날에만 그녀가 만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녀가 동아리 선배에게 고백하는 순간에도 나는 함께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는 준비한 말을 끝까지 전했다. 고백은 거절당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옷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 세탁기를 먼저 거쳤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조금씩 수명이 줄어들었다. 특히 소매 끝에 작은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졸업 이후 그녀가 나를 찾는 횟수는 점점 줄었다. 옷장에서 그녀의 선택을 받아 나서는 친구들을 그저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그녀가 다시 나를 찾기 시작한 건 꼭 수요일이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녀는 마을버스를 타고 20분 거리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그녀는 이젤 위에 집에서 들고 온 캔버스를 올렸다. 지난주에 그려진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이 덧칠되었다. 그녀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말없이 물감을 묻힌 붓을 든 손만이 캔버스를 오갔다. 강사의 질문에도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수업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도서관 앞에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약속은 따로 없어 보였다. 그녀는 예전에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을 보며 제주도의 초가집을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린 화병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가 사용한 물감은 나에게도 흔적을 남겼다. 공장에서 나올 때 인쇄되어 있던 프린팅이 물감으로 가져졌다. 그녀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앞치마를 챙겨 입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녀의 작업복이 되었다. 그래도 좋았다. 옷장 속보다는 작업복으로서 쓸모가 있다는 게 더 나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몰입해 있었다. 그녀가 고른 색의 밝기와 붓을 쥔 손의 리듬에서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였다. 대학 시절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생기가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했다. 그녀가 행복하길. 나는 그렇게 그녀와 마지막 한 계절을 보냈다. 함께하는 순간은 끝나지만 그 시간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여전히 빛나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