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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Dec 13. 2018

전진

나의 위안

한 해의 마지막 달. 마을버스를 타고 구립 도서관으로 가는 거리엔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많이 보였다. 빨간 거리에선 활기가 느껴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무채색 옷들을 껴입은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2년 동안 일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된 나는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누구라도 만나자고 생각하고 집 밖을 나섰지만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었다. 인터넷만 둘러보다가 서양화 수업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수업은 매주 수요일 14시부터 두 시간 동안 진행된다고 했다. 첫 달은 무료 수업. 늘 내 방에 꽃그림 하나를 걸어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돈은 없지만 시간은 많은 지금이 딱 좋은 기회 같았다.
 
첫날은 그림을 그리는 대신 도서관 직원분께서 선생님 소개를 해주셨다. 그리고 함께 수업 들을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평일 낮 시간의 수업이라 그런지 나를 제외한 학생은 모두 어머님들이었다. 어머님들은 막내인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시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젤에 8호 캔버스를 세워두고 한 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팔레트를 들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며 신이 났다. 중고등학교 때도 미술시간을 좋아했었다. 특히 수채화보다 물감이 마른 후 수정이 가능했던 유화를 좋아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년 만에 처음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알록달록한 색들을 보니 내 마음에도 조금씩 생기가 채워지고 있다.
 
하얀 캔버스 전체에 밑그림으로 잘 그리던 못 그리던 과감하게 어두운색부터 채웠다. 배경은 빠르게 고민 없이 붓질을 했다. 선생님은 그런 터치를 좋아해 주셨다. 오로지 내 앞의 그림만을 생각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몰입의 순간이었다. 매일 수요일만을 기다리며 4주를 보내고 나니 그림 하나가 완성되었다. 다음 그림은 더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고흐의 그림을 습작하며, 그림을 그리는 내내 ‘그만 그리고 집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입 꾹 다물고 손은 바지런히 움직이며 수업 시간을 채웠다.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께서 색감과 터치가 좋았다며 엉덩이를 두드리며 칭찬해주셨다. 가장 격렬한 칭찬이셨다. 더 잘하고 싶어서 고민하면 손에 힘이 들어가고 그래서인지 부자연스러운 터치가 나온다. 그래도 오늘의 성과는 신경 쓰고 고민했던 꽃잎의 터치와 꽃 몽우리를 칭찬받았다는 거다. 나의 고민이 맞았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전보다 좋아지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방향을 찾은 느낌이다. 그림을 그리며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 더 나아졌다는 위안을 받는다. 좋아하는 작가를 떠올려본다. 일단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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