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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은 Jul 22. 2020

일단 해봐야 후회도 하지

가장 후회했던 쇼핑

8년 전 여름, 처음으로 혼자서 하는 해외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그보다 일 년 전, 함께 여행을 다녀왔던 친구는 여행 내내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를 보며 새로운 별명을 찾아줬다. ‘고기 먹는 초식동물.’ 그런 내가 혼자서 태국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던 건 대학 후배가 코이카 해외봉사단으로 치앙마이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바빠 잘 만나지 못했던 사이지만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도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에 지인들은 면세점에 가서 명품백 하나 정도는 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내 마음에 헛바람을 넣었다. 반복적으로 그런 이야기에 노출되며 면세점을 이용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사고의 오류로 계획에 없던 가방을 충동적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면세한도를 훨씬 초과한 가격이었다. 여행 첫날 출국장에서 인도받은 면세품은 여행 내내 캐리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콕에 도착해서 카오산 로드로 갔다. 치앙마이행 버스 티켓을 구매하고 버스를 탈 때까지 그곳에 짐을 보관할 수 있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캐리어를 끌고 다니기로 했다.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에서 나만 큰 캐리어를 덜그럭 거리며 끌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비까지 내리자 일단 관광이고 뭐고 비를 피하기 위해 배고프지 않아도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평소보다 많이 씹고 천천히 식사를 했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고 카페로 한번 더 피신해야 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노점에선 내가 좋아하는 팬케이크를 팔고 있었지만 배가 꺼지고 비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옷을 입을 때만 시간, 장소, 상황(T.P.O)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쇼핑에도 티. 피. 오가 중요했던 거였다. 치앙마이에선 후배의 안전한 숙소에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었고 내 걱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후배가 치앙마이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는 동안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일이 끝나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여행 온 느낌보다 친구 집에 놀러 온 느낌이었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후배를 따라 현지 극장에도 가보았다. 영화 상영 전 국왕 찬가가 나올 땐 관객 모두가 기립하는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대사 많이 없을 거라 기대하며 선택한 독립영화는 마침 배우와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은 배우는 한국에서 왔다는 나에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대사가 나올 때마다 영어자막도 함께 나와서 알지 못하는 언어의 영화를 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고 흔치 않은 추억으로 남았다. 후배의 배웅을 받으며 야간 버스를 타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별일 없이 여행을 끝내다는 생각에 긴장을 풀고 놓고 출국 수속 대기줄에 서있었다. 내 앞에선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가족들과 함께 캐리어 안에 짐을 넣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대기줄이 짧아지자 학생의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챙겨 온 짐이 많아서 그중의 일부를 내 캐리어에 실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캐리어에 테트리스 하듯 짐을 넣는 모습을 말없이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곳으로 가는 어린 학생에게 왜인지 연민의 감정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그러겠다고 했다. 나의 대답을 듣고도 짐을 싸는 일을 멈추지 않던 그들은 나에게 계속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그 모습이 공항직원의 눈에 띄었는지 직원은 나에게 와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자식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었던 학생의 부모는 포기를 몰랐고 그들은 나의 도움 없이 짐 싸기에 성공했다. 입국 수속을 하며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기분이 들었다. 공항직원들이 나의 동선을 따라서 무전기를 통해 서로 암호와 같은 대화를 나누었고 수하물을 찾은 나를 한 직원이 불렀다. 면세한도 초과에 대한 세금고지서를 받게 되었다. 공항직원은 친절하게도 이 세금을 내더라도 백화점에서 산 금액보다는 싼 가격에 가방을 구입한 거라고 알려줬다. 그때서야 방콕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할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세상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했으면서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다니. 그 학생이 내 캐리어에 넣어달라고 한 게 뭔지 알고 그러겠다고 승낙했던 걸까? 불법 약물이라도 들어있었다면 어쩔 뻔했던 건가. 갑자기 뒷목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충동적인 쇼핑으로 여행 후에도 한동안 여행경비와 가방의 할부 값을 갚기 위해 커피를 마시는 행복한 시간의 빈도를 줄여야 했다. 그 후론 내 돈을 내고 비싼 가방을 구입하지 않게 되었다. 남들이 좋다던 그 가방들은 일단 가죽 가방 자체만으로도 무게가 있어서 잘 들게 되지 않는다. 자가용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라면 모를까. 러시아워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며 읽지 않아도 꼭 책 한 권씩 들고 다니던 나에겐 가격 대비 실용성이 많이 떨어진다. 내게 명품 가방은 옷을 갖춰 입고 결혼식에 참석할 때 멜 하나 정도로 충분하다. 요즘은 여행을 가며 면세점을 이용할 기회가 생겨도 욕심내지 않는다. 작은 화장품 파우치에 쏙 들어갈 수 있는 화장품 한 두 개만 사게 되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이 꼭 나에게도 좋은 건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잘 모르는 걸 선택할 때일수록 다른 사람들의 경험치에 휩쓸리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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