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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Feb 08. 2023

하루를 버티게 하는 것들

어느 날 궁채 나물을 먹다가

 48시간 단식을 했다.


 몇 년 전 부터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는 케토시스(ketosis) 방식의 다이어트는, 초기 단식을 통해 빠르게 케토시스 상태에 진입할 수 있다 하여 시작했고, 성공적으로 마쳤다. 결혼 이후 매일 야식을 함께 할 아내가 있고, 얼마 후에는 코로나 시대를 맞으면서, 내 몸은 어느새 100kg를 훌쩍 넘는 몸이 되어 있었다. 3월이면 만나게 될 내 아이가 뚱뚱한 아빠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맘에, 전에 없이 강도 높은 다이어트를 계획하고 실천하게 됐다. 더불어 언젠가 아버지께 간 이식을 해야 할지도 모를 미래를 위해, 지방간도 없앨 겸. 괜찮다. 이 전에도 해 봤으니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회사는 꽤 뒤숭숭하다. 희망퇴직 공지가 올라왔고, 올 해 진급하여 언제든 해고가 가능하게 된 몸이 된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월급 똑같은 회사에서 조금 일 할수록 시간당 연봉이 높은거 아니냐며 거드름을 피우던 김대리는, 아직은 먼 미래에 일이겠지만 그래도 가시권에 들어온 희망퇴직이라는 단어에 다시 일에 집중하려 하는 김과장이 되었다. 괜찮다. 다들 힘들다는 시기에 월급도 꽤 올랐고, 돈 벌어서 잘 굴리면 언젠가 아내랑 아이에게 호강 비슷한 것을 시켜줄 수 있을테니 일하는 것은 싫지 않다.


 집에 오는 길에는 회사 선배의 조모상이라 하여 장례식장을 들렀다가 먼 길을 돌아서 왔다. 평소보다 두세시간은 늦은 귀갓길.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보니 반찬가게가 있다. 나는 밑반찬이나 요리는 꽤 잘 하는 편이라, 반찬가게 같은 건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언젠가 산책하던 중에 "반찬가게에서 뭐 좀 사볼까?" 라고 했던 아내의 말이 기억났다. 스스로 요리를 잘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고, 아마도 아내는 내가 하는 음식 말고 다른걸 먹고싶다는 얘기를 돌려서 한 것일텐데, "반찬가게에서 사면 맛도 없고 비싸기만 해. 먹고 싶은거 있으면 말해봐, 내가 해줄게." 라고 눈치없게 얘기했던 나의 한심함도 같이 떠올랐다. 괜찮다. 내가 못하면 사다주면 된다.


 [나물 4개에 만원, 세일중] 이라고 써 있는 코너로 걸어갔다. 아내는 나물을 좋아한다. 가격표와 포장된 양을 보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가격이다. 물론 요즘 만원으로 외식하면 제대로 먹을게 없는 시대라는 건 알지만, 집에서 직접 반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물가에는 선택적인 화풀이를 한다. 하지만 이 가격이 내가 이 반찬가게에서 그나마 허용 가능한 선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고는, 원래 고르려고 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나물 네개를 골라서, 오늘 회사 아침 간편식으로 수령한 삶은 계란 네개가 담긴 비닐봉투에 구겨넣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빵집이 보이고, 요새 임신당뇨 관리한다고 좋아하던 베이커리를 먹지 못하는 아내가 생각나서, 크로칸 슈 하나를 집어서 계산한다. 손에는 먹을 것이 가득하다. 괜찮다. 내가 단식해도 아내와 아이는 잘 먹고 행복하면 그걸로 좋다.


 집 앞에서 코로나 걸린 어머니와 잠깐 통화를 한다. 당신 몸이나 잘 챙길 것이지, 아내 잘 챙겨주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도 걸리셨다고 한다. 간 질환, 심장 질환을 모두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고위험군이라 더 걱정이 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비닐봉투를 건네고, 케토시스 상태가 잘 유지 중인지 확인한다. 미약한 케토시스 상태라고 나오는게, 정상이지만 괜히 내 48시간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나 하는 마음에 화가 난다. 아기 방에 넣을 가구는 뭐가 좋을지 재잘대는 아내를 앞에 두고, 단식 끝에 만나는 무탄수 식단의 맛에 감탄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맛있는걸 왜 평소에는 안 좋은 것을 먹었을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중에 아내가 왜 반찬통 하나를 다 먹냐고 화를 낸다. 평소 먹던 양의 절반도 안 된다는 생각, 먹어도 살 안찌는 건강한 궁채나물을 가지고 왜 화를 내는지 억울해서 대꾸하니 기분은 더 안 좋아진다. 차라리 식사를 안 했으면 더 나았을까, 괜히 식사를 해서 기분이 들락날락 한 것 같은 후회가 몰려든다. 논리적이지 않은 억지 인과성을 만들어 마음속의 꼬마가 심통을 부린다. 이게 다 먹어서 그런거야. 마저 12시간 단식 하지 왜 여기서 멈췄어, 진짜 끈기 없네.


 하루 내내 버티고 지냈다. 낮은 혈당, 회사의 권태와 불안, 보고서의 막막함, 정작 선배는 미국에 있어 얼굴도 보지 못한 문상과 멀리 돌아오는 퇴근길, 나물 이만큼이 무슨 만원이냐며 마주한 옹졸함, 그 모든 것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할 때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상상한 행복의 그림은 현실의 온도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버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던 무게가 태산처럼 나를 짓누르며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하루는 후회만 남고, 왜 내 하루를 지탱하는 것들 중에 '나'는 없었는지 생각한다.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이 내 하루를 지탱할 때, 그 마음이 댓가를 바란다면 여지없이 현실은 배신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할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옹졸한 나의 너그러움은 거기까지다.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중간은 했으면 좋겠다. 내가 하루를 너를 보고 살았는데, 나를 칭찬하지는 않아도 된다. 하지만 나무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너의 허락 없이 너를 상상하고, 너의 의사와 무관하게 너를 위했으니, 그것을 칭찬받거나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루를 버틴 나를 조금 칭찬하고자 먹은 궁채나물이 그렇게 잘못이었을까. 너에게 긴 하루가 있었던 것 처럼, 내게도 긴 하루가 있었을텐데, 그걸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아니면 이런 사소한 나무람에도 무너져내린 나의 하루가 잘못이었을까.


 이럴 때 마다 항상 마음속의 심통난 꼬마가 다짐한다. 하루를 '너'로 채우지 말고, '나'로 채우자고. 나를 위한 행동으로 하루를 살아가자고.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나를 위한 행동이 뭔지 모르게 됐다. 남들은 골프도 치고, 위스키도 마신다고 한다. 여행도 안 간지 오래됐다. 사람들은 내가 요새 재미없다고 하면 "너처럼 재밌게 사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 커피는 링거 수액이 되었고, 술은 스트레스 안정제가 되었다. 책은 또 다른 돈벌이를 위해 봐야 하는 것이 되었고, 운동은 살기 위해 하는 것이다. 사진 찍는 감성은 돈이 되지 못한다는 무의미함에 건조되어 버렸고, OTT 몇 개를 구독하는데 돈이 아까워서 영화관도 못가고, 컴퓨터 비싼 거 샀으니 돈 되는거 해야지 라는 죄책감에 게임도 못한다. 한 때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의미가 변질되고 사라져서, 이제 나는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은 너다. 내 가족은 내 종교이자 신념이 된다. 오늘은 이렇게 망가졌지만, 버텨야 할 내일이 또 있다. 또 하루 잘 살아보면 되는 것이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은, 언젠가 진심이 닿을 것이란 망상조차 없다. 입으로 전달하지 않는 것들은 보통 끝까지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살아오면서 느꼈고, 그래도 아마 끝까지 구구절절 말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서, 너도 나처럼 누군가를 위하는 삶을 사는 하루를 보낼 때, 느낄 수 있겠지. 반찬가게에서 만났던 손바닥만한 1팩에 3,500원이라는 나물의 경악스러운 가격을 보면서, 매일 손수 반찬을 만들어주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던 나처럼. 그 때가 되면, 아마도 그 대상은 자녀들이겠지만, 그 때는 너도 댓가를 바라지 않고 사랑을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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