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스 이후의 액션 트렌드
영화감독 순위를 매긴다면, 기준을 불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떠오를 것이다. 이 외에도 유명한 감독을 꼽으라면 언급될만한, 조지 루카스, 마틴 스콜세이지, 쿠엔틴 타란티노 등, 오래전부터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을 만큼 여러모로 인정받은 감독들과 그들의 영화를 굳이 한 번 더 소개하는 것은, 데이터 낭비와 웹 서버 오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브런치북을 통해, 명작과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과정에 있는 영화와 감독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누군가는 이미 거장이라 말하는 감독들, 명작이라 말하는 영화들이지만, 아직 세 살부터 여든 살까지 다 안다고 보기는 어려운 영화와 감독들을 소개하여, 어디 가서 맞장구칠 수 있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는, 루소 형제의 영화를 [캡틴아메리카 : 윈터 솔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루소 형제는 그 유명한 마블 스튜디오의 어벤저스 시리즈의 감독이다. 형 앤소니 루소와 동생 조 루소가 팀으로 활동하며, 감독의 흥행 순위로는 스티븐 스필버그, 제임스 카메룬에 이어 3, 4위에 랭크된 무시무시한 상업성을 가진 감독이다. 마블 스튜디오에서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로 데뷔를 했는데, 영화의 엄청난 성공과 호평으로 이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의 감독을 맡아 연타석 홈런을 치게 되고, 마블 스튜디오의 사장인 케빈 파이기의 눈에 들게 되어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 [어벤저스 : 엔드게임]으로 전 세계 박스오피스 2위와 6위에 이름을 올리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는 '마블판 다크 나이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슈퍼 히어로 영화답지 않은 완성도와 진중함을 보여준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는 [캡틴 아메리카 : 퍼스트 어벤저]의 후속작인데, 영화 시작 3분 만에 아침 조깅하는 것으로 1편의 이야기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그 이후 10분은 1편에서 둔탁한 근육덩어리 같았던 캡틴 아메리카의 기억을 날려버리는 밀도 있고 전술적인 액션을 통해, 이 영화는 후레시맨 같은 특촬물로 보였던 1편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영화 초반 '배트록'과의 육탄 대결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quNcV0j2M0w
루소 형제의 철학 중 하나는, [액션 장면은 그 캐릭터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것이다. 구구절절 이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액션 장면을 통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잘 대변하는 장면 중 하나는, 실드에서 배신당한 캡틴 아메리카와, 하이드라 실드의 엘리베이터 대결 장면이다.
[캡틴아메리카 : 윈터 솔저, 엘리베이터 전투 씬]
https://youtu.be/hLUdF8cjzyA?si=0CxxKHnJGcyyi-UW
캡틴은 수적 열세에 있어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우는 캐릭터이다. 첨단 무기로도 의지를 꺾을 수 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주는 강한 신념을 가진 캐릭터임을, 루소 형제는 이 엘리베이터 전투신에서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여담이지만 이는 몇 년 후 루소 형제의 [어벤저스 : 엔드게임]에서도 나타나는데, 온몸이 상처 투성이에 방패도 깨지고 적군은 몰려오는 상황에서, 비록 혼자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방패 끈을 조여매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벤저스 : 엔드게임, 마지막 전투 직전]
https://www.youtube.com/watch?v=_dSPIZwgMEk
메인 캐릭터 설정을 끝낸 루소 형제는, 본격적으로 첩보 액션 영화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는 슈퍼 히어로 영화라는 색을 거의 완전히 벗어버린다. 캡틴과 윈터 솔저, 팔콘과 럼로우라는 균형 잡힌 대결구도를 통해 어느 한쪽의 초인적인 능력이 빛나는 장면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관객은 슈퍼 히어로물이 주는 초월적 액션의 쾌감은 충분히 느끼면서도, 그로 인한 이질적인 느낌 없이 첩보물의 긴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특히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고속도로 전투씬에서의 나이프 파이팅은, 마블 스튜디오에 한정되지 않고 다른 어떤 영화와 견주어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씬은, 루소 형제가 잘 사용하는 '소리'로 표현되는 액션이 아주 맛깔나게 나타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 고속도로 전투씬]
https://www.youtube.com/watch?v=bp6hhq8DdgU&t=83s
이후 영화는 현대의 첩보물이 가지는 요소들을 두루두루 표현하며 영화를 성공적으로 그려 나간다. 단순히 선악으로 그리기 어려운, 각자의 신념이 만들어낸 양대 축의 충돌과, 그 안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인물들. 믿었던 것들에 의한 배신감과 동료의 재정의, 결코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표현한 결말까지, 웰 메이드 첩보 액션 영화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멋지게 표현한다.
이후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 [어벤저스 : 엔드게임]에서도 루소 형제의 '액션을 통한 캐릭터 설명'은, 영화의 텐션을 유지하고 밀도를 높이며, 스타일리시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매번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야 했던 마블 스튜디오 영화들의 입장에선,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꼭 필요함에도 그로 인해 영화가 늘어지는 리스크를 극복해야만 했고, 그 상황에서 루소 형제의 이러한 능력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덕분에 마블은 성공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를 [어벤저스 : 엔드게임]에 등장시켰고, 결과는 세계 박스오피스 2위라는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상업적 성공은 필연적으로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루소 형제의 성공 이후,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영화는 보기 어렵다. 특히 넷플릭스로 인해 짧은 러닝타임과 빠른 템포를 가져가는 요즘의 상업영화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양산형 액션영화의 구성은 대부분 처음 몇 분간, 뜬금없이 싸움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죽거나 하면서 사건이 꼬이고 영화가 시작하는 그림으로 시작하게 된다. 우리가 최근 의미 없이 봤던, 제목도 잘 기억 못 할 킬링타임용 영화가 대부분 이런 식이 었을 것이다.
트렌드의 홍수는, 또 다른 스타일로 걸출한 성공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나타날 때까지는 지속될 것이고, 우리는 점점 피로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의 답습은, 결코 오리지널을 따라가지 못한다. 상업적 측면, 서사적 측면, 구성적 측면에서 모든 니즈를 만족시키기 위해 루소 형제가 만들어낸 이러한 액션은,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사용되었을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는 명작의 반열에 올라갈 만하지 않나 생각한다.
요즘 영화들 왜 다 똑같냐? 하는 말에, 이게 원래는 루소 형제가 잘하는 방식인데, 너 어벤저스 봤지?라고 말하면서 이야기한다면, 어디 가서 영화 좀 본 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루소 형제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부터는 [존 윅]의 액션팀과 함께하면서, 한 층 더 스타일리시한 액션을 구사하게 되었고, 이러한 액션은 마블 스튜디오가 아닌 다른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몇 가지 영화 클립으로 루소 형제 스타일의 멋진 액션을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익스트랙션]
존 윅에서 잘 사용되던 롱 테이크 액션과 모잠비크 드릴(가슴 두 발, 머리 한 발), 그리고 나이프 파이팅
https://www.youtube.com/watch?v=glOnDceqqJc
[그레이 맨]
라이언 고슬링이 비행기에서 배신당해 싸우는 장면. 적절한 주변 도구의 사용과 분홍색 연막탄을 이용한 액션으로, 라이언 고슬링의 캐릭터가 변칙적인 싸움 방식과 문제 해결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https://youtu.be/KbHwbv_0k4A?si=Ql4-SV97GABko25w&t=68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윈터 솔저의 나이프 파이팅에 당하던 크리스 에반스가, 이번에는 라이언 고슬링에게 나이프 파이팅을 선사한다.
https://youtu.be/GSU9Sux0Ryg?si=Nr82c1pp8DjQ-ifG&t=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