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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pr 10. 2023

인생에 치트키가 있다면

많은 것이 부족한 사람의 합리화 과정

 9살 즈음, 지방에 있던 외삼촌 댁에 간 적이 있다. 사촌 형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되었을까, 나랑 놀아준다면서 컴퓨터로 [삼국지 무장쟁패]라는 게임을 하게 해 줬었다. 격투 게임이라고는 문구점 앞에 쪼그려 앉아서 하던 [스트리트 파이터 2] 정도밖에 몰랐던 내게, 돈을 넣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임이라는 것은 별천지였다. 집에 가기 전까지도 그것만 붙잡고 있었고, 집에 와서도 그 게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얼마 후 내 생일에, 삼촌이 생일 선물을 사주겠다고 하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삼촌은, 어릴 때 겪은 사고로 장애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고 조카만 챙기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내 장난감이나 게임 같은 오락거리를 곧 잘 사주시곤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용산 전자상가의 어느 점포에 가서, 그 삼국지 격투게임의 이름도 모른 채로 그저 삼국지 게임 달라고 했더니, [삼국지 영걸전]이라는 게임을 줬던 아저씨. 아무 생각 없이 최신으로 잘 나가던 게임 추천해 주신 것이겠지만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집에 와서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 4장으로 게임을 설치한 후 시작한 게임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RPG(롤 플레잉 게임) 장르의 삼국지였다. 유비가 평원에서 데뷔해서, 역사를 따라 주욱 진행되는 그런 게임. 처음엔 솔직히 매우 실망했지만, 하다 보니 어느새 푹 빠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삼국지 영걸전]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어려운 게임이었고, 나는 그 게임을 어떻게든 클리어해 보고자 똑같은 전투를 몇 번을 다시 해 보기도 했고, 내가 모르는 이 전투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있을까 하는 의심에 삼국지 책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면서 게임에 열중했었다. 덕분에 지금 나는 삼국지에 대한 지식이라면 Chat GPT가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갔던 친구 집에서 [삼국지 영걸전]을 발견했다. 친구는 게임의 [에디터]라는 것을 말하면서, 이걸 쓰면 아군의 모든 능력치와 레벨을 최고치로 올릴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이해도 되지 않았고, 친구한테 받아온다는 생각도 없이, 집에 와서 무슨 파일을 어떻게 수정해야 그런 게 되는 건지 한참 찾아보면서 컴퓨터와 씨름했다. 한두 달 고생하던 끝에 결국 포기한 나는, 친구에게 [에디터]는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보고, 방학숙제 하나 해주기로 하고 파일을 디스켓에 받아왔다. 


 [에디터]로 유비를 비롯한 모든 장수를 Lv.99로 만들어서 하는 게임은 정말 신나는 것이었다. 힘들게 한 칸씩 옮겨가면서, 어디까지 가서 어떻게 공격해야 가장 효과적일지 고민하던 것은 무의미했고, 그저 돌격해서 공격하면 적들은 픽픽 쓰러져나갔다. 마우스만 까딱거리면 어느새 전투는 승리해 있었고, 그렇게 한 시간여를 게임하던 나는 어느새 굉장히 지루해져 있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을까.






 살면서 돈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앞날이 걱정될 때, 살이 잘 안 빠질 때, 회사 일이 많다고 느껴질 때, 수 없이 만나는 장벽 앞에서 나는 잠깐의 망상에 빠진다. 갑자기 계좌를 조회해 보니 몇백억이나 되는 돈이 계좌에 당연하게 있는 상황, 자고 일어나니 캡틴 아메리카 같은 몸매와 운동능력을 가진 남자가 되어있다던지, 광속으로 움직일 수 있거나 엄청나게 몸이 단단하거나 해서, 너무나 쉽게 그 장벽을 돌파하는 망상을 한다.


 정말 돈이 많다면 어떨까, 마블 히어로처럼 비현실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쉽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어릴 때 [에디터]로 게임을 접했던 내가, 한 시간 만에 게임에 질려버렸던 것처럼, 인생은 그다지 재미있는 콘텐츠가 아닐 것이다. 물론 돈이 많으면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보다 돈이 정말 많아서, 훨씬 부유한 삶을 사는 그는 나보다 더 인생이 재미있을지 생각해 본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게 분명하다. 그도 분명 그보다 부자인 누군가보다 결핍을 느끼고 있을 것이고, 그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시시함을 느끼면서, 돈이 많아진 만큼 비례적으로 재밌어지지 않은 삶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으나, 나는 행복을 삶의 목표로 둔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공통된 자원은 시간이다. 이 시간이라는 자원은 인생의 방향에 따라 돈, 건강, 사랑, 지위 등 여러 가지 2차적 변수로 환산되어, 복합적으로 행복이라는 함숫값을 만들어낸다. 초기값이야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함수의 형태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기 삶의 함수의 형태를 해석해 나가기 위해, 돈이 1원 많아질 때, 건강이 1만큼 나빠질 때, 사랑이 1 늘어날 때, 지위가 1 상승할 때, 얼마나 내가 행복해지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인문학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 인생의 함수는 고약하게도 Time-variant 함수이기 때문에, 지금과 내일, 1년 뒤, 10년 뒤의 함수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매 순간 자신을 탐구하고, 고찰하고, 스스로를 단정 짓지 말아야, 내 인생이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파악할 수 있다. 무작정 시간을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행복할 것 같지만, 이미 나는 [삼국지 영걸전]의 [에디터]를 통해서, 시간의 소요를 0으로 만들었을 때 발생하는 행복의 상실을 맛봤다.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는 단순한 답을 원하지만, 결코 행복이라는 함수의 그 어떤 미분, 편미분값도 단순한 상수가 아니다.






 아쉽게도 지금의 내 상태에서 돈이 조금 더 많다면 더 행복할 것은 분명하다. 분명 내 인생의 함수에서 지금 구간은 돈과 행복이 비례적으로 상승하는 구간일 것이다. 건강, 사회적 지위도 마찬가지이고, 아마 대부분의 것들이 비례적으로 상승하는 구간이겠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다만 슬프지 않다. 오히려 재미있다. 나는 아직 클리어하지 않은 많은 챕터가 남아있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어떤 장비만 갖추면, 특정 능력만 키우면, 인생이라는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인생이라는 게임은 클리어가 목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내게는 인생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가 핵심이다, 꼭 Lv.99로 게임을 클리어하지 않아도, 오히려 Lv.60의 아이디로 게임을 클리어할 때 훨씬 더 재밌을 수 도 있다는 생각 한다. 가끔 Lv.99를 망상하겠지만, 그건 내가 가진 하나의 취미 활동일 뿐인 것이다. 내 삶에는 그 어떤 치트키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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