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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pr 03. 2023

기쁜 일을 기뻐하기

 이제 태어난 지 만 3일 된 아이는 작고 예쁘다. 다행히 인큐베이터에서는 하루 만에 나와서 근심을 조금 덜었다. 이제 아직도 아파하는 아내만 잘 회복하면 첫 단추를 비로소 잠그게 된다.


 친구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봤을 때 눈물이 났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자녀가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모습까지 상상하면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아이였고, 너무 작고 연약한 아이가 눈앞에 있으니, 사진과 영상을 많이 찍어서 산모 보여주세요 라고 말하는 간호사님의 말에도 대충 몇 장 찍고 얼른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길 바랐다. 무서웠다. 저 작은 아이가 아프면 어쩌나.


 아내는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사실 처음 낳자마자도 하염없이 울었다. 자연분만 중 아이 심박수가 급락해서 응급 제왕으로 낳고, 준비도 못하고 엉겁결에 낳은 것 같아 미안하고 속상하다며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울었고, 나는 옆에서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또 준비한 대로 되지 않았다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무사히 낳았고, 둘 다 건강하면 최선의 결과이니 속상할 것 없다며 위로했다.




 코로나 해제가 되지 않은 병원은, 신생아 면회는 일 2회, 각 15분으로 제한한다. 그것도 아빠는 유리창 밖으로만 볼 수 있고, 엄마는 수유할 때 직접 볼 수 있다고 한다. 오히려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아직 아이를 만질 자신이 없다. 나처럼 조심성 없는 사람이 만져도 되는 걸까. 긁히기라도 하면 어쩌지, 운동한다고 손에 굳은살도 많은데 진작 장갑 끼고 운동할걸. 설거지도 고무장갑 끼고 할걸.


 아이를 보고 아직도 웃음이 나지 않는다. 옆에서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다른 아빠들을 보면, 나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널 만난 지 00일'이라는 피켓을 들고 사진 찍어 달라고 하는 아빠들만큼 내가 아이에 대한 사랑이 없는 걸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왜 저렇게 기뻐하지 못할까. 왜 그렇게 걱정만 하고 살까.




 나는 어릴 때 아버지와 공놀이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아버지는 형사 시절 큰 사고를 당하셔서 많은 수술을 하셨고, 한쪽 눈이 안 보이신다. 힘든 형사일을 하시다가 집에 오시면 잠을 청하기도 바쁘셨을 것이고,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공놀이를 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불만은 없었고, 아쉽지도 않았다. 항상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았으니까. 한 번은 그게 미안했던지, 어머니가 같이 농구하러 가자고 하신 적이 있었다. 이미 아들과 공놀이를 하기에 어머니는 나이가 들었고, 아들은 곧 사춘기였다. 재미없는 놀이는 한 번으로 끝났다.


 아버지를 항상 잠에서 깨어나시면 빌려오신 비디오를 틀었다. 그렇게 아버지 옆에 앉아 이틀에 한 번은 영화를 보던 어린이는 왓챠피디아에 1200편이 넘는 영화 평점을 찍은 30대가 되었다. 아버지는 꽤 무뚝뚝하셨지만 영화 보면 항상 몇 마디를 던지셨고, 그 덕에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는 아버지와 대화가 조금은 더 많지 않았나 싶다. 공을 차고 몸을 직접 부딪히진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유대감을 형성하는 우리만의 방식이었다.


 서로 보고 웃지도, 칭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무섭고, 항상 눈치를 봐야 했던 아버지와의 관계였지만, 그 무뚝뚝함이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항상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해서 짧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시던 것, 엄마는, 할아버지는 계시냐, 바꿔드릴까요 여쭤보면 됐다 하고 끊으시던 그 전화는 항상 가족을 살피고 걱정하던 것이었다.


 부재중 통화 녹음이 되던 전화기를 집에다 놓고 지내던 시절, 나는 9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체포했던 범인이 출소 후에 협박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녹음기에서 나오던 무시무시한 말을 나는 듣지 못했지만, 들은 어머니는 얼굴이 파래져 아버지께 전화를 했고, 아버지는 얼마 뒤 집에 오셔서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부숴버리던 게 기억난다. 아버지는 화가 났었고, 굉장히 폭력적인 장면이지만, 나는 그게 아버지가 우리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항상 아버지가 강조하셨던, 가족끼리 서로 지켜야 한다는 그 말씀과 연결된 것인지, 무섭게 느끼지 않았다.


 가족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우린 서로 예쁘다 잘한다 멋지다 얘기하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절제되어 있었고, 함부로 기뻐하지 않았다. 내가 상을 받거나 시험을 잘 봤을 때에도, 꽤 이름난 대학에 합격했을 때에도 우리 가족은 대놓고 기뻐하지 않았다. 가난했던 우리 집에겐 과분했던 TGI Friday라는 무시무시한 가격의 레스토랑에 외식을 가서, 아버지는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한 마디 해 주신 게 전부였고, 어머니는 좀 더 잘하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아쉬움을 보이셨다. 속상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원래 그랬으니까. 재미없는 가정도 아니었고, 꽤 웃음이 많은 집안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인색한 가정.


 그런 집에서 자랐음에도 시골 개처럼 감정표현이 풍부한 나를 두고, 부모님은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아내한테도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 말하고, 결혼하고도 부모님과 하루에 한 번은 통화를 한다. 부모님에게 아쉬운 것은 없지만,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연습되지 않아서 인지 표정은 다양하지 못하고, 웃음기는 금방 사라지고, 못나게도 한숨을 입에 달고 산다. 실컷 사랑한다 말하고 부엌에 가서 한숨을 쉬고 있는 나를 보며 아내는 꽤 큰 혼란을 느낀다.




 아이를 앞에 두고 예쁘다 말하고 싶고, 주변에 자랑도 하고 싶고, 티도 내고 싶다. 하지만 걱정이 그에 앞선다. 건강했으면 좋겠다, 배고프진 않을까, 저 녀석 콧잔등에 씻기지 않은 저건 뭘까, 귀 한쪽이 눌려있는 것 같은데 한쪽으로만 누워서 그런 걸까, 걱정된다. 병실로 들어와선 아내가 비슷한 걱정을 쏟아내면 하나씩 이유를 들어가며 아내를 위로하고 안심시키지만, 나는 안심하지 못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 걱정은 덜 필요가 없는 것인지 모른다. 내게 걱정은 사랑이다. 내 부모님이 내게 보여준 사랑의 형태가 걱정이었던 것처럼, 나도 내 걱정을 멈추고 싶지 않다. 이 걱정이 끝나면 다음 걱정거리를 찾는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을 머릿속에서 잠시도 비우지 않는 것이 내가 받은 사랑의 방식이었고, 어느새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멋들어지지 않은 방법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나를 지키기 위해 했던 그 절절함이 나는 고맙고, 내 가족에게도 똑같이 그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만, 세대가 지나면서, 부모님에서 나로, 나에게서 내 자녀로 가면서, 걱정은 줄고 기쁨이 많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도 더 사랑의 말을 하고, 기뻐할 일은 기뻐하는 연습이 필요하겠지. 내 걱정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겠지만, 내 아내와 자녀는 더 많은 사랑의 말을 듣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그들의 걱정까지 내가 다 해도 좋다.




 어제 잠시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을 때, 어머니는 어린이대공원에 벚꽃을 보러 나오셨다고 했다. 이제 손자까지 봤고, 본인의 걱정은 끝난 것 같다고. 이제야 비로소 세상을 즐겨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혼자서 떨어지는 벚꽃 잎을 손으로 받아가면서, 봄의 향취를 한껏 느끼셨다 한다. 언젠가는 나도 그럴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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