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따온 호박잎 껍질을 깐 후 몇 장씩 추려 비비고 있는데 이웃집 형님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묻는다. 아마도 대문살 사이로 내가 보였나 보다.
"형님. 그 밭에선 호박 익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 익을까 싶어 아껴둬보기도 했는데 얼마 못가 썩어버리더라고요. 용케 익은 것도 오래가지 않아 썩어버리고..."
사실 나도 따기를 망설였던 호박이었다. 호박을 보는 순간 늙은 호박으로 얻고 싶은 바람이 일었더랬다.
텃밭을 일구며 알게 된 것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밭마다 그 밭이 원하는 작물이 있다는 것. 즉 잘 자라는 작물이나 풀이 다르다는 것. 흙(성질)과 조건(바람이 지나는 것. 햇빛 방향과 시간 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런 만큼 내 밭이 무엇을 잘 키워내는가를 아는 것이 뭣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호박을 심으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겉에 드러나는 것이 밭의 전부가 아니란 것이다.
첫해 호박을 심었다. 손톱만 한 호박들이 조랑조랑 열렸다. 볶아 먹어볼까? 부침개도 맛있지? 노랗게 익혀서 호박죽 끓여먹을까? 친정 언니도 하나 주고 동생도 하나 주고.... 상상에 상상을 더하며 즐거웠다. 그런데 대부분 앵두보다 조금 더 자란 상태로 노랗게 썩어 갔다. 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자란 것은 어쩌다 간혹.
그 이듬해엔 웬일로 썩지 않고 누렇게 익는 호박이 하나 둘, 세개나 땄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아 썩었고, 썩지 않은 것도 단맛이 많이 느껴지지 않아 실망스로웠다. 이런 우여곡절을 몇 년 동안 되풀이하며 우리 밭은 호박이 자라기는 괜찮은데 열매로는 '그다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옆 밭에서 수확한 호박도, 또 다른 방향 옆 밭에서 수확한 호박도 그렇단다. 아마도 텃밭이 있는 그 일대가 호박에 그다지 맞지 않는 흙이기 때문 아닐까?
한편 우리 밭에서 캔 고구마는 매번 달디단데 친정 밭에서 자란 고구마는 잘 썩는다. 심지까지 생긴다. 다른 작물들은 어지간하면 잘 자라는 밭인데 말이다.
"줄기까지잘랐어? 조심해서 따지 않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주로 아점을 먹는다. 호박잎을 쪄 아점 밥상에 올렸더니 남편이 호박잎 사이에서 손톱만 한 호박이 달린 줄기를 발견해내고 이처럼 묻는다.
"얼마 전 방송에서 들었는데, 호박 줄기가 너무 무성하게 자라면 호박 이 잘 안 열린다네. 그래서 지난주에 줄기 몇 개 잘라냈더니 저 호박이 열린 거야! 그동안 거의 안 열렸거든! 지난주에 갔을 때 저 호박도 없었고!"
텃밭을 일구며 자주 망설인다. 잘라버려야 할 것과 그대로 둬야 할 것을 두고. 앞집 아저씨는 줄기 잘라내기를 참 잘하신다. 우리보다 늦게 심어도 뭐든 훨씬 잘 자라거나, 작두콩 같은 것이 훨씬 많이 열리는 것은 줄기 잘라내기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여전히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