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습관
"선생님, 우리 조만간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까요?"
교생 시절 영화 마션 (The Martian, 2015) 을 모티브로 한 고등학교 1학년 광합성 단원을 수업 중에 한 녀석이 제법 진지하게 질문을 던진다.
"글쎄, 아마도 선생님 세대에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너희 세대에는 모르지."
그러자, 나보다 머리 두 개 더 있는 큰 덩치를 조그만 책상에 몸을 구겨 넣은 L이 이렇게 외친다.
"우리 세대는 망했어요. "
어찌어찌 교생실습이 막바지로 접어들며 3월 마지막 주가 되었다. 그전 주부터 들어가는 반 마다 아이들 여럿이 결석을 하고 컨디션이 안 좋다는 아이들이 속출했지만 모두 그저 독감 유행 정도라고 생각했다.
팬더믹으로 학교를 닫기 전 마지막 주 나의 멘토이던 v 선생님의 마지막 이야기가 생각난다.
"다음 주부터 팬더믹 때문에 학교 문을 닫는다. 너희들 대부분은 건강하고 젊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손을 잘 닦도록 해. "
후에 학교에 돌아갔을 때 우리 세대가 망했다던 녀석의 아버지가 코비드에 감염되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물 선생님이 손만 닦으면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그 아이한테 과학은 무엇일까?
난 운이 좋게도 멘토 선생님을 잘 만나서 하루에 다양한 수준의 과학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의료계나 과학계를 꿈꾸는 아이들, 틱톡에 올릴 춤추느라 과학에 대해 알 시간이 없는 바쁜 아이들, 그리고 먹고사는 일이 급한 비영어권 아이들.
오해가 없길 바란다. 비영어권 아이들이라고 모두 가난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 중엔 부모 없이 친구들끼리 살며 오후에는 식당에는 밤늦게까지 일하는 녀석들이 많았다.
가끔 그런 녀석들 중엔 또래 친구들보다 먼저 부모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유전 법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궁금했다. 식당에서 설거지며 짐 나르는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손이 두꺼비 같은 녀석들은 눈 뜨는 것 자체가 일이다. 그런데 과학적 호기심은 사치 아닌가?
한국학교에서 만난 곱게 자란 왕자 같은 한 녀석은 나를 처음 만난 중2 때 해양생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렸을 때 WHY책을 줄줄 꿰고 있었고 과학잡지도 많이 보았다고 했다.
고2가 된 그 녀석에게 아직도 해양생물학자가 되고 싶냐고 물으니 자기가 언제 그런 꿈을 꿨냐고 한다.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겠단다.
한 때 과학을 좋아했고, 과학자도 되고 싶었던 이 녀석은 왜 과학에 흥미를 잃었을까? 왜 과학자가 되길 포기했을까?
나는 돈도 안 되는 쓸데없는 그런 것이 궁금하다.
도대체 내 머릿속은 어떻게 생겼길래 맨날 그런 쓸데없는 궁금증이 맨날 생기나 싶어 뇌과학이 궁금해졌나 보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플라스크를 만져본 적이 없고, 다행히(?)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만저본 기억이 없다. (난 아주 소수의 인간을 제외하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만지는 게 싫다. 물론 죽은 것도. ) 고등학교에 과학실이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난 이공계 전공자다.
과학으로 시작했고 조금 더 돈 버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 공학으로 졸업했다.
수학을 싫어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때 문이과 갈림길에 단숨에 이과를 선택하기도 했고, 다른 것보단 흥미로웠다. 적어도 실용적이지 않나 싶어서.
대학에서 경험한 과학이나 공학이나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갈 생각, 놀러 갈 생각, 술 먹을 생각, 연애할 생각에 뭉쳐질 생각이 전혀 없는 소금 덩이들이 원망스러웠다. 실험실 기구들은 그저 비싼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또 과학 관련 대학원을 갔다.
대학원에선 그나마 진짜 실험 같은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진짜 살아 움직이는 생쥐를 이용한 실험이었다. 진짜 생쥐를 이용한 실험을 하는 실험실도 생각보다 흔치 않다. 생쥐 몸값이 얼마인지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배도 갈랐고, 현미경도 썼고, 온갖 기구들, 약물도 사용했다.
열심히 하긴 한 거 같은데 갈수록 미궁이다.
도대체 내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어떻게 아는 거야? 도대체 배운 건 언제 써먹는 거야? 뭘 배운 거야?
20년이 지난 지금 뇌과학이 아닌 곳이 없다. 마케팅도, 다이어트도, 교육도 뇌과학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그러니 뜨는 분야를 제대로 고른 것은 맞다. 그런데 내가 제대로 과학을 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과학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과학이 아니꼬운 이유는
비인간적이다. 직관적인 감을 중요시 하는 인간에게 과학은 증거를 들이대라며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딱 봐도 맞는데 뭘 꼭 증거가 필요한가?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이 반기든 반기지 않든 자연은 자기들의 법칙대로 존재한다.
비싸다. 내가 도둑이라면 나는 실험실에 도둑질을 하러 갈 테다. 물론 훔쳐서 팔 곳이 없다는 시장경제의 문제가 있지만 아무거나 들어도 비싼 곳이 실험실이다. 대학시절 실험실 조교가 플라스크가 떨어지거든 얼른 발을 갖다 대라고 했다. 발이 깨질지언정 플라스크는 깨면 안 되는 가격이라나. 우리가 추앙해 마지않는 ChatGPT도 생성하는 정보만큼 돈을 내야 한다. 무료로 OpenAI를 제공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이 유료화시킨다면? 유료화된 서비스를 받는 이들의 속도와 질은? 과학만큼 돈이 많이 드는 분야도 없고 그래서 과학은 부자들, 선진국들의 전리품이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과의 싸움이 아닌 영역은 없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과학은 더 치열하고 잔인하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먼저 찾는 것만큼의 희소성, 혁신성이 과학의 가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퍼즐이 전체 그림을 예측하게 하는 퍼즐이라면? 속도도, 영향력도 경쟁이 치열하고 대단해서 여유롭게 논의하고 생각하고 할 시간이 없다. 그 뒤엔 예측 불가능한 후폭풍이 있다.
정치적이다. 과학이 사실을 입증하니 객관적일 것 같지만 과학도 사람들 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이라 정치적이다. 과학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의 객관성을 뒤에 숨어 있는 사용자, 번역자의 주관성에 배신감이 든다.
그런데 과학은 배워야 한다.
왜?
지금 손가락으로 손흥민의 세리머니처럼 카메라를 만들어 아무 데나 사진을 찍어보자.
내 손가락 사진에는 유리창과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 나무 두 그루, 뒤뜰에서 신는 신발, 가로등, 잔디, 시멘트 계단이 보인다.
울타리에 칠해져 있는 페인트와 울타리를 만든 나무판은 물에 젖어도 썩지 않도록 특별히 화학 처리 된 것이다. 가로등은 전기가 사용할 수 있는 발명품이다. 심지어 우리 집 가로등은 저녁 11시가 되면 저절로 꺼지는 타이머가 설치되어 있다. 가로등을 만든 철제 물질을 가공하고 제조하는 과정에도 물론 여러 가지 과학 지식이 들어갔을 테다. 우리 집 뒤뜰에 놓여있는 슬리퍼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술로 인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저렇게 뒹굴고 있어도 색도 안 변하고 눅눅해 지지도 않고 그대로다. 벌레가 빈자를 메우기 위해 지난가을 내가 신나게 뿌려댄 잔디 종자는 음지든 양지든 상관없이 잘 자라도록 개량된 품종이다.
집 안으로 들어오면 사진기를 더 작게 만들어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영위하는 대부분의 안락한 생활과 편리에는 과학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 떼려야 뗄 수 없어서 배워야 한다고 아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파블로처럼 곤충 잡으러 다니고, 길 거리에 꽃을 모아 분류하고, 하늘에 별을 보면 가슴이 뛰는 아이들은 흔하지 않다. 개미 잡아오면 빨리 갖다 버리라고 꽥 소리치는 엄마 때문인지, 하늘 보고 멍때리면 공부하라고 아빠 때문인지 후천적으로 사라진 과학적 호기심인지 몰라도 소수다.
우리 대부분은 먹고살기 위해, 잘 살기 위해, 편하게 살기 위해 그냥 하는 거다. 그냥 과학은 대충 건너뛰고 돈 되는 기술만 개발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대학입시에서도 자연과학보다는 써먹는 공대가 훨씬 인기가 좋다.
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않고도 차를 잘만 몰고 다는데 과학 좀 이용한다고 과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반문이 들린다.
차를 몰려면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 한다.
어떻게 차를 몰아야 안전한지, 서로가 준수하는 규칙은 무엇인지 시험에 통과해야 면허증이 생긴다. 그리고 도로 주행 전에는 연수도 받아야 한다. 무턱대고 끌고 나갔다가는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 도로 연수도 해야 한다.
과학도 차처럼 도구다. 인간이 살고 있는 자연계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다. 지구라는 별의 시간에서 보면 막 걸음마를 뗀 애송이 인간은 면허시험이나 도로 연수도 없이 과학이라는 대형트럭을 손에 쥐었다. 경쟁 덕분에 대형 트럭의 기능이 갈수록 좋아지고 정교해지고 있다. 모두 더 큰 대형트럭, 더 힘센 트럭을 가지려고 할 뿐이다. 면허증을 발급해 주는 곳은 없다. 그렇다고 손에 있는 대형트럭을 포기할 텐가. 무거운 거 들고 왔다 갔다 하면 운동도 되고 좋다고 눈 가리고 아웅 할 텐가. 대형트럭으로 한 번에 나르면 쉽고 간단한 테 모두 다 안전한 사회 정의를 위해 어려움을 참자고 하면 설득력이 있을까? 성선설인지 성악설인지는 건너뛰고, 확실한 건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인간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남들은 다들 대형트럭 다고 쌩쌩 달리는 길에 혼자 걸어가다간 바퀴에 깔려 흔적도 없이 죽을 것이다. 위험하니 트럭공장을 닫자고 하는 것은 섣부르고 무식한 결정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트럭을 만들지 않아도 누군가는 만들 테니 현명한 해답이 아니다.
결국엔 도로 규칙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규칙에 의존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 규칙은 원래 사고가 생긴다음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규칙이란 만드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감시하는 사람, 벌주는 정체가 필요하다. 그 정체는 권력을 갖게 된다. 그럼 권력의 남용은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래서 과학은 정치와 뗄 수없다.
그렇다고 지레 걱정만 늘어놓아 규정만 복잡하게 미리 만들어 놓으면 좋은 트럭 만들기가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어쩌라는 거야?
제일 좋은 건 법 없이도 사는 세상이 아닐까? 모두가 법 없이도 사고 없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도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운전자가 과학이란 도구의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과학적인 주관을 가져야 한다. 운전자들의 인식 수준이 높아져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잘 사용할 수 있는 트럭을 개발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런 개발을 응원하고, 지원하고 그런 트럭을 사주는 유행이 생기면 어떨까?
운전면허 정도 기능을 위해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과학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이제 인공지능 시대가 열렸다. 1950년에 처음 인공지능이 개발되었다는데 그때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발명이었다. 지금은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인터넷, 빅데이터, 딥러닝과 같이 주변 과학의 발달과 함께 힘을 받아 이제 본격적인 과속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일부가 걱정하고 원하지 않고 막는다고 해도 자신에게 편의를 제공하다면 대다수는 사용할 것이므로 개발은 계속될 것이다.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내는 가짜 영상, 가짜 뉴스, 유명인 사칭 투자 영상은 내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코앞에 와 있다. 정신 건강 생각해서 모르고 사는 게 좋다며 긍정적으로 살려고 모래 얼굴 묻고 사는 타조를 자초하는 것뿐이다.
오늘 내가 맛집에서 기분 좋아 무심코 찍어 올린 내 얼굴이 국제 범죄조직의 가짜 여권에 들어가서 쓰이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섬뜩하지 않은가.
내 얼굴이 들어간 가짜 영상, 합성 영상을 찾아내는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빌게이츠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테크노필식 생각이다. 그러면 그 영상을 못 찾아내게 만들고, 숨긴 영상을 또 찾아내고 이런 식으로 끝도 없는 창과 방패의 싸움 끝에 남는 것이 무엇일까?
게다가 과학은 비싸다고 하지 않았는가.
최근 조승연 작가와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IMF 지원금을 통해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유일무이한 나라인데, 싱가포르와 한국과 같이 비약적 성공을 이룬 배경에는 유교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서양이 그들의 잣대로 1950년대의 한국을 uneducated country라고 내린 평가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한국어와 영어 사전에서 과학, 과학적이란 단어를 찾아본다.
과학적: 과학의 바탕( 과학의 바탕이 무슨 소리일까? )에서 본 정확성이나 타당성이 있는 것 (정확성과 타당성이 있는지 어떻게 알지?)
과학(科學)「명사」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 뭐에 대한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學)을 이르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 과학을 이른다
(표준 국어 대사전)
sci·en·tif·ic
1. based on or characterized by the methods and principles of science.
2. systematic; methodical.
sci·ence
1. the systematic study of the structure and behavior of the physical and natural world through observation, experimentation, and the testing of theories against the evidence obtained.
"the world of science and technology"
2. ARCHAIC knowledge of any kind. "his rare science and his practical skill"
(Oxford Dictionary)
한국어 사전은 두리뭉실하기 짝이 없다. 영어 사전은 과학적, 과학의 정의조차 체계적이다. 차이가 보인다.
무식한 이가 아니라면 지금 한국을 미개한 나라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뒤따라갈 대상이 없다.
근대 과학의 연구 체계와 교육 체계라는 면에서 한국은 뒤쳐졌지만 인성, 철학, 가치교육에서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나라다. 결국 인성, 철학, 가치 교육의 힘으로 우리는 근대 과학 분야에서 격차를 줄였다. 너무 빠른 속도를 이루다보니 인간 중심의 역사가 흔들리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흔적도 없는 것보다야 쉽지 않을까? 미국처럼 오랜 기간 선진국이었던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 시스템을 따라가려면 한국 과학은 갈 길이 멀다.
이왕 갈 길이라면 제대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한국이라면 인류를 위한 가치로운 과학, 과학적 사고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과학계의 한숨이 들린다.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이과생도 문과생도 힘을 모으면 배가 산이 아닌 대양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과학 교육이 변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같이 생각해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책. 습. 관을 발판 삼아 한낱 나비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더라도 날갯짓을 해 볼까 한다.
과학 관련 종사자들, 과학자를 키우는 교육자들, 그리고 과학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이 나는 상상도 못 할, 나로서는 어림없을 대단한 일을 해주길 기대하면서.
나비 효과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는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즈(Lorenz, E. N.)가 사용한 용어로, 초기 조건의 사소한 변화가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복잡계의 특성을 이르는 말이다.
시작은 과학 용어로 날씨 예측이 어려운 이유처럼 지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가 미치는 토네이너급의 예측 불가능성을 일컫는 일상어로 발전하였다.
[출처 https://namu.wiki/w/%EB%82%98%EB%B9%84%20%ED%9A%A8%EA%B3%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