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방송에서 집 꾸미기 영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나 놀라운 건 자가가 아닌 집에 영구적인 손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살기 편하고 예쁘고 잘 꾸며서 사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자기 집도 아닌데 집 예쁘게 꾸미겠다고 섣불리 망치를 휘두르거나 벽을 때려부셨다가는 집주인에게 쫓겨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살자니 영 불편하고 사는 맛도 안 난다.
현재 인간은 지구에 세 들어 사는 거주인이다. 13억 년 전에 만들어진 지구 소유권을 가진 적이 없다. 산 시간으로 따지면 우리보다 더 오래 실거주한 종들이 많다. 발전 기여도로 따져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겠지만 누구 입장에서 발전인지 애매하다. 게다가 현재 인간의 힘은 집주인인 지구와 힘겨루기를 하기는 턱이 없다. 그래서 마음대로 쓰다가 뒷일 생각 안하고 머스크씨처럼 다른 집 찾아 가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민 생활 해봐서 알지만 환경을 바꾼다는 게 녹록하지 않다. 다른 집 주인들이 무조건 반길리가 없고 우여곡절끝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같은 방법으로 집을 쓴다면 더 빨리 이삿짐을 쌓야할 수도 있다. 우리가 거주할 기간도 자연계 시간표에서는 아주 잠시에 불과한 임시 거주인이다.
언제 적 고등학교인가.
검색창에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을 쳐본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찾아보니 고급과정 같은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전과 비슷하다. 한국고등학교는 1학년에 통합과학을 듣고, 2학년에 화학, 물리, 생물, 지구과학 1단계, 3학년에 화학 물리, 생물, 지구과학 2단계를 한꺼번에 1시간씩 듣는 식이다.
미국고등학교에서 졸업을 위해 이수해야 하는 기초 과목은 생물, 화학, 물리학이 보통이다. 학교에 따라 물리학이 선택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환경. 생태학 (Ecology Science) 도 많은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아직은 선택 과목인 경우가 많고, 3학년, 4학년이 되면 과학, 공학, 의학 계열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동물 생태학, 대학에서 학점이 인정되는 과학, 해부학 등 더 세부적인 과정이나 심화 과정을 듣는다. 미국 공립 교육에서는 실험 수업을 중요시 여기는 분위기 탓에 실험을 많이 넣는다. 항상성을 공부하면서 계단을 오르락 내리게 하고 심장박동수를 기록하게 한 후 심장 박동수의 패턴을 보게 하는 식이다. 좋아 보인다. 실제로 아이들도 좋아한다. 덜 지루하기도 하고, 흥미를 갖기도 한다. 물고기에 대한 지식보다 과학적 사고에 해당하는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접근방식이다.
이렇게 하는 과학 수업이 한국 고등학교에서 문제풀이식 보다 훨씬 나을까?
날라리였어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지나 치른 미국 과학 교사 자격증 기초 평가 시험이 할 만했던 것으로 보아 주입식 교육, 문제풀이식 교육이 아주 쓸모가 없었다고 할 순 없다. 실제로 미국 연구소에서 일하는 과학자들 중에는 요즘 아이들이 상식 수준의 기본지식도 없다며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볼맨소리를 한다. 게다가 미국에서 연구교수, 박사 후 과정을 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찾기 어렵지 않다. 고등학교 때까지 플라스크 한번 안 잡아봤어도 심박수 재는 거 정도 해본 격차 뛰어넘는 것은 금방이다. 빨리 하려고 옆 팀 데이터 베끼는 아이들, 제일 쉬운 실험으로 골라서 하려는 아이들, 그냥 남들 하는 거에 숟가락만 얹어서 대충 점수나 따려는 아이들 비율을 고려하면 진짜 과학적 사고를 했나 싶은 아이들은 극소수다. 심화반에서는 더 진지하게 실험을 한다며 피펫을 사용해서 플레이트에 넣는 연습을 한다. 그치만 이런 피펫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실험실도 많다. 방법도 계속 변한다.
되려 실험실에서 이것저것 한다고 기본적인 용어나 개념조차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 그래프를 읽을 줄 모르는 아이들이 문제가 더 심각해 보이기도 한다.
과학과 과학적 사고는 다르다. 과학은 지식과 사고를 포함하는 합이다. 지식이 없다고 과학적 사고를 못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고, 과학적 사고 좀 한다고 과학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지식 위주 수업의 문제는 양이 너무 많다. 지식이 변할 수도 있다. 과학은 진리 아니었어?
예전에 함께 일하던 간호사 출신 동료는 언제는 계란 노른자가 콜레스테롤 때문에 안 좋다며 먹지 말라더니 이제는 흰자도 노른자도 같이 먹어야 한다고 도대체 어느 말을 믿으라는 거 냔다.
어느 데이터는 콜레스롤수치가 올라가고, 어느 데이터 수치는 심지어 내려가고. 어느 수치는 콜레스테롤 수치는 올라가는데 심장병은 낮아지고. 어느 수치는 콜레스테롤 수치는 올리는데 눈은 좋아진단다.
장난하나? 장난 아니다. 과학이다. 물론 마케팅 전략, 경제원리, 이득권에 의한 영향도 있지만 실험의 조건도 다르고, 실험군도 다르니 데이터는 들쭉날쭉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들쭉날쭉 한 데이터들을 여러 개 모으고 모아서 경향성, 일관성을 찾아내는 게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 친구처럼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을래 하거나, 역시 달걀을 하루에 한 개만 먹으라던 할머니 말이 딱 맞는다고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과학을 전혀 몰라도 내릴 수 있는 결론을 낸다. 이런 과학의 속성을 가장 잘 이용하는 분야가 정치다. 예를 들면 누구처럼 기후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거나. 이렇게 과학이 신뢰를 잃었나 싶다. 이게 싫고, 굳이 빨리 갈 생각이 없다면 적당히 묵혔다가 정설로 받아들여져서 이론이 되거든 알아보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다.
지식 자랑용으로 틀릴 확률이 거의 없는 과학이 알고 싶으면 역사적으로 오래된 과학 이론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된다. 남들도 다 아는 거 일수도 있으니 얼마나 자랑이 될지 모르겠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선 새로운 과학 지식으로 자랑하고 싶다면 최신 동향을 담은 학술지, 과학잡지, 과학 기사를 읽으면 된다. 단, 다음 모임에서 지난번 말한 내용을 뒤집을 기사를 읽고 온 친구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달걀 이론엔 정답이 없지만 여기엔 정답이 있다. 고전으로 불리는 과학서를 읽어 정설이라 불리는 이론을 이해하고 새로운 과학계 동향을 접하고 주관적으로 점쳐보면서 이해해 가면 된다. 돈은? 물론 예측을 잘하는 과학적 식견을 가진 사람이 번다. 그럼 돈은 누가 잃을까? 기본이 되는 과학 지식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사람들이 잃는다. 비싼 콜라겐 크림에 들인 돈은 피부는 콜라겐과 같은 덩치 큰 외부 물질로 보호해 주는 막이라는 과학 지식을 무시하고 젊어지고 싶은 욕망과 심리적 만족감을 위해 지불한 대가다. 더 무시무시한 대가들에 비하면 콜라겐 크림 값 정도면 애교다.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에게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의외로 과학이라는 아이들이 많다.
어린 시절 내셔널 지오그라피 다큐멘터리 광팬들도 많고 과학책을 끼고 살던 녀석들도 적지 않다. 고등학교 과학 수업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심장이 세 개 달린 문어이야기, 호랑이와 사자의 대결은 안 배운다. 그런 게 재미있는 사실인 것은 맞지만 재미있는 사실의 나열은 과학의 일부분일 뿐이다.
과학 수업에 아이들은 4단계 변신을 한다.
흥미로운 과학적 발견이나 소식을 들려주면 눈이 반딧불 꽁무니처럼 반짝인다.
실험을 하겠다고 하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실험을 하고 나서 데이터를 분석하라고 하면 햇빛에 나온 지렁이들 마냥 괴로워한다.
그리고 마지막 과학 용어가 도배된 지문이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면 매미가 남기고 간 번데기 껍질이 된다.
그래서 신기한 과학 지식이 과학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녀석들도 과학수업이 시작되면 변심을 한다.
과학이 자연법칙을 찾는 학문인 것은 맞지만 자연 앞에 인간은 코끼리 앞의 장님 신세다.
각자 맡은 부분을 만지고, 만지는 부분이 달라도 서로 통하고, 납득이 되는 규칙들을 찾아가면서 코끼리 비슷한 형상일 거라는 가정을 세우고 증명하며 퍼즐 맞추기처럼 법칙을 찾아가는 것이 과학이다. 그렇다면 이쯤 되면 진리가 아닐지 모르는 지식보다 방법을 가르치는 게 효율적이지 싶다.
존 듀이가 쓴 책 How we think? 란 책에 쓰인 많은 내용은 현재 미국 과학 교육 과정 집필자가 보고 베꼈거나 진짜 아들인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이 겹친다. 진짜 공교육의 아버지가 맞구나.
존 듀이가 말하는 과학적인 사고방식.
관찰, 분석, 추론, 비판을 통해 생각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을까?
지구가 평평하다는 가설을 믿는 이들의 논리도 나름 비판적이고, 관찰적이고, 추론적이고 분석적이다.
그런데 왜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이들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보고 싶은 데이터만 보고 있을 것은 아닐까?
제일 간단한 예로 우주에서 찍은 지구 사진은 어쩔 텐가?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구가 평평하다는 근거만 모으고 살겠다고 해도 말릴 순 없겠지만 아마도 NASA에서 일하긴 어려울 테고 다른 많은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을 수 있다, 그 외는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사고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효율적이지 않다. 역사를 통해 발견된 믿을 만한 퍼즐 조각을 기준으로 새로운 퍼즐 조각을 찾아야 전체 그림을 보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래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학 지식을 배워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 과학계에는 공동체 과학이라는 말이 나온다.
인터넷의 발달로 많은 정보를 공유하면서 일부에서는 과학도 창조적으로 대하는 새로운 부류가 생겼다. 꼰대들의 과학이 아닌 자기들만의 과학을 하겠다 뭐 이런 심리랄까? 소셜 미디어로 과학을 배우는 십 대들이 음모론에 빠져드는 게 위험한 이유다. 기준으로 삼는 퍼즐조각부터 틀린 경우 뭘 해도 계속 틀리는데 애착은 계속 쌓인다.
가설(hypothesis)이 이론(Theory)이 되려면 이들의 과학적 근거를 통해 찾은 법칙이 다른 생물, 다른 환경, 다른 데이터들 다른 영역에도 확대 적용 가능한가? 를 시험해 봐야 한다. 우리 집 냄비, 우리 집 오븐, 우리 집 물로만 끓여야 요리를 잘할 수 있다면 어디 가서 요리사라고 하긴 어렵고 요리실력에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과학에는 정설(맞는 설)이란 말이 있다. 가설이 대단한 양의 근거로 받침이 되어 이론이 된다. 이미 수백 년 전 지구가 평평하다는 정설이 뒤집힌 경우도 있으니 정설이 진리는 아니다. 그럼 정설도 뒤집힐 수 있다고?
장님이 코끼리 다리부터 시작하지 않고 코끼리 상아부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자. 우윳빛 미끈한 상아의 표면만 만지던 장님에게 코끼리는 미끈하고 반질반질하며 딱딱한 무엇이다. 이건 그쪽 장님계에서는 정설이다. 그런데 그중 한 장님이 코끼리의 거칠고 짧은 털이 난 피부를 만진 순간 코끼리는 매끄럽다는 정설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잊으면 안 된다. 평생을 걸려 열심히 만졌는데 상아에 난 작은 흠에 불과하면 어쩔 텐가. 작은 흠은 놀라운 발견이지만 코끼리 전체를 파악하는데 그다지 영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흠에 대한 기록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소 김은 빠지겠지만 이건 코끼리 전체를 설명하는 특징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바쁘다. 증거들을 수집하느라고. 증거의 범위를 확대하고, 서로의 데이터를 검증하고 서로의 퍼즐을 맞추느라고. 영향력이 큰 과학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다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는 것이 과학이다.
미국은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기 때문에 교육 수준의 범위가 아주 넓고 양극화가 또한 심한 나라다. 한국과는 수요도 다르고 기초 능력도 다르다. 그러니 미국처럼 교육해야 한다고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다. 물고기에 대한 지식도, 물고기를 잡아 본 경험도 중요하다. 물고기에 대한 지식과 물고기 잡는 기술 중 하나면 있으면 소용없다. 게다가 걷잡을 수 없는 기술의 발달과 정보의 생산으로 모두 다 공부한다는 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쯤 되니 요령이 생긴다. 잡은 물고기를 어쩔 건데? 뭐 하려고 잡은 건데?
딱 잡아서 먹을 물고기만 공부하는 건 어떨까?
목적 있는 과학만 하는 건 어떨까? 인류에 도움 되는 과학만 하는 게 가능할까?
목적은 끝을 알 때 가능한 이야기다. 만지려는 게 코끼리인지 알 때 다리를 공부할지, 머리를 공부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코끼리인지 식탁인지, 다리가 될지 머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목적을 세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어떻게 과학 할 거리를 찾을까?
논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연구나 드물게는 실험실에 일어나는 우연한 현상을 발견해서 과학 할 주제를 찾기도 한다. 흔하게는 연구실에서 지도 교수나 선배 과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이어서 연구하거나 반증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어렴풋이라도 인류에 도움이 되는 과학이라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돈이 목적일 수도 있다. 돈 버는 과학이 다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돈을 벌기 위한 과학이라면 원하지 않는 결과를 보여주는 데이터에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싶다.
과학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의 섭리를 재단할 수가 있다고 믿는 태도와 자연의 섭리를 감히 재단할 수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만지다 보면 어렴풋이 코끼리인지 예측 가능하지 않겠냐는 태도로 나뉜다. 스티븐 호킹이 쓴 시간의 역사를 보면 자연의 웅대함과 우연의 확률 앞에 겸허한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이런 그의 태도 때문에 그가 무신론자인지, 종교인인지는 논의대상이 되곤 했다.
미국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선 보통 1학년에 생물학, 2학년에 화학, 3학년에 선택적으로 물리학을 듣는 경우가 많다. 미국 과학 고등학교 교사 구인정보에 가보면 제일 많이 찾는 빈자리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순서로 정확히 반대다. 생물 교사들은 다른 과학 교사에 비해 넘쳐난다.
왜일까?
우리한테 가까이 있는 것에서부터 보기 어렵지만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순서에 따라 접근 가능성이 정해진다. 물론 미국이나 한국이나 의사가 되려고 시작했다가 중도 포기한 이가 많다는 이야기도 일리가 없진 않지만. 보기 어려운 곳, 안 보이는 곳으로 갈수록 최신, 고도 과학 영역인 경우가 많다.
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해서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학문이다. 풀도 연구하고 동물을 연구하고, 미생물도 연구한다. 인간의 겉도 연구하다가 속도 연구한다. 조금 발전해서 유전자도 연구하고 뇌 속도 연구한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 손 닿으면 가까이에 있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고, 조금만 노력하면 보인다.
화학은 물질을 이루고 있는 재료, 본질에 대한 학문이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재료들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어떻게 결합하는지, 서로 작용하면 어떤 변화가 생기지를 연구하는 화학은 노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관찰의 대상이 생물학보다 현저하게 작아진다. 현미경을 들이댄다고 보인다는 보장도 없다.
물리학은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한 학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이야기만 봐도 물리학을 왜 가장 나중에 배우는지 가늠하게 한다. 에너지, 힘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손에 잡히지 않지만 현상으로 보아 작용하는 뭔가 있긴 있다. 본 적은 없는데 다른 갤럭시가 있단다. 생물학도가 곤충 잡으러 다닐 때 물리학도 중엔 의자에 앉아 생각 실험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대학시절 2-3시간이면 끝나는 물리학 실험 조교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화학, 생물학 실험 조교를 불쌍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나마 화학실험은 실험 계획에 따라 시간 조절이 가능한데 생물 시간표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학 실험은 주말에도 학교를 나가야 해서 최악이었다.
아이들 진로 지도를 위해서는 전반적인 과학계 구조를 이해하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
곤충이 좋아 생물학과에 진학했어도 곤충을 만져보는 경우는 극히 적다.
예전엔 대학에서 전공이 대상에 따라 동물학, 유전공학, 미생물학 등 세부적으로 나뉘었지만 지식이 넘쳐나는 변화에 발맞춰 요즘은 과를 통합해서 더 크게 묶고 그 안에 다양한 세부학문을 관련 기본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교과과정을 짠다. 그러니까 곤충이 좋아도 정작 직접 곤충과 관련된 수업은 들어야 하는 네 과목의 수업 중 동물생태학 한 과목에서 한두 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대학원 정도에 진학해야 곤충을 만질 기회가 많아진다.
대학 갈 때 조금 신경 쓰면 과 이름정도 보고 대부분은 대학 이름을 보고 간다. 이렇게 대학을 갔다면 고등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과학에 실망스러울 수 있다. 대학 교과 과정도 들여다보고, 지도 교수님 이력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정말 곤충이 좋다면 곤충학을 하시는 선생님이 있는 학교를 찾아가는 가야 하지만......
빠른 속도로 지식이 쌓이는 양이 너무 방대해서 수업으로 다 배울 수 없는 지경으로 우리는 가고 있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학교는 시식 코너 역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블로의 곤충기 같은 과학 고전이 단비가 된다.
너무나 거대한 자연 앞에 겁 많고 벌거숭이인 인간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살아남기 위해 자연을 나름 체계적으로 나눠서라도 이해해 보자 하는 인간의 문화, 과학을 만들어냈다.
추위에 지켜줄 털도 없고, 임신기간을 비롯해 양육기간도 길다. 걷는 데까지 근 1년이 걸리는 인간의 아기가 정글에 던져진다면 어떻게 될까? 예민하지만 신체적 생존 능력이 우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차별화된 생존 무기는 뇌다. 사자에게 쫓길 때는 그 무게가 불리하지만, 사자를 잡을 도구를 개발하는 능력이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남은 생존방법이다.
사자가 날카로운 이빨과 앞발로 영역 싸움을 하듯 인간은 과학을 가지고 영역 싸움을 한다.
생존에 급급하던 인간은 예측하기가 가능해졌다. 예측을 기반으로 수많은 성공을 맛본 인간은 집 자체도 새로 지을 수 있으면 지을 량이다. 집 꾸미기의 강도는 더욱 세지고 있다. 집주인 행세를 해도 되는 걸까?
자연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