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병실. 덩그러니 침대하나.
과에서 제일 잘 생겼던 선배는 복학 첫 학기에 코에 호흡기를 차고 눈을 뜬 채 누워 있었다.
26살 선배는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고3 시절 의대를 가고 싶어하던 친구를 따라 들어가 본 의대 해부학실.
어느 의대생의 배려로 들어가본 해부학 실에서 덮여진 시트 옆 튀어나온 시체의 팔을 봤다.
고무같은 그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
선배의 피부는 딱딱하긴 해도 내 것과 비슷했는데.
몇 주 지나 선배의 링거와 호흡기는 떼어지고 장례가 치러졌다.
병문안을 갔을 때나 장례를 치를 때나 선배는 두 번 모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거, 살아있다는 건 뭘까?
생물과 무생물을 나누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초등학생도 한다.
그런데 노벨상을 탄 과학자들도 생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쉽지 않다고 한다. 에르빈 슈뢰딩거, 폴 널스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같은 제목의 책을 냈다. 어디선가 읽은 블로거는 이 책들을 읽었지만 생명에 대한 정의를 모호하게 피해 갔다고 했다. 생명은 00이다 하지 않았으니 답을 안 한거라면 맞는 말이다 . 하지만 생명이 있는 생물에게만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면 설명을 하긴 한 셈이다.
움직이게 하는 것이 생명인가? 차는 움직이지만 생물도 아니고 생명도 없다.
나무는 움직이지 않지만 생물이고 생명이 있다.
나에게 노벨 수상자도 답을 피한 생명이 뭐냐고 묻는다면 난 변화, 성장, 번식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주적으로 생산되는 에너지라고 할 것이다. 무생물만 있던 지구 탄생 초기 엄청난 열과 방사선과 같은 에너지가 난무했다. 그때 우연히 발생한 에너지를 품은 무기물의 결합체는 생물이 됐다. 불안정한 에너지를 내보내고 안정된 상태로 가고자 하는 변화가 첫 번째 호흡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작된 호흡으로 내부에서 에너지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생물은 진화를 통해 선택된 적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에너지를 생존에만 사용하느라 급급하던 생물들 사이 성장에도 사용하는 세포가 등장한다. 세포수만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능의 다양성을 가진 세포도 등장한다. 단순한 복제에서 더 나아가 생물은 번식을 한다. 번식의 과정에서 운동성도 획득했을 것이다. 번식을 통해서 생물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종의 영속성이다.
신이 숨을 불어넣어 살아나는 흙덩이처럼 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얻으면 생물 공장은 살아난다. 생물들이 에너지를 얻는 대사 과정을 우리는 호흡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경우 산소를 들이마셔서 연료를 태워서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로 물과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일부박테리아처럼 질소를 마셔서 호흡하는 생물도 있다.
호흡에 뇌는 필수가 아니다. 해파리는 뇌가 없어도 넓은 바다를 돌아다니며 " 산다." 뇌가 없어도 연료를 넣어주면 공장은 돌아간다. 나무도 뇌는 없지만 공장을 돌리는데 문제가 없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게 뇌의 주역할은 연료를 찾아서 우리 몸속에 집어넣는 것과 관련된 행위를 관리하고 실행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에 해당하는 부분, 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뇌의 상태, 우린 그걸 뇌사상태라고 부른다.
몸에 들어가는 산소의 역할은 뭔데?
작은 불씨가 호호 불면 불이 커지듯 산소가 있어야 당을 태우는 몸속 용광로에 활활 불이 타 올라 에너지가 생긴다. 정상적인 상태의 우리는 우리 콧구멍으로 들이마신 산소와 우리 입으로 집어넣은 음식에서 연료를 얻는다.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당류들이 바로 몸 공장이 선호하고 필요한 연료의 원천이다. 이렇게 우리가 먹은 빵, 밥, 국수, 과자, 사탕, 과일 같은 탄수화물은 다양한 형태의 탄소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당이라고 불리는 화학결합체이다. 이 화학 결합체가 결합된 방식을 끊어주면 ATP라는 형태로 에너지를 나르는 화학결합체가 나온다. 탄수화물의 결합을 끊어내어 사용가능한 ATP로 만드는 과정 자체만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가 필요하기 때문에 더 복잡한 구조로 된 탄수화물을 먹어야 다이어트에 좋다고 한다. ATP는 가상세계에서 통용되는 전자화폐처럼 몸이라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에너지 화폐이다. 화폐를 만든 종이가 의미가 있는게 아니라 화폐라는 돈의 가치가 만들어 내는 변화가 같은 힘이 화폐의 진짜 가치다. 세개의 인산 구조로 이루어진 ATP가 에너지가 더 안정적인 두개의 인산 구조로 이루어진 ADP로 변하면서 내는 에너지 때문에 ATP는 에너지 화폐라 불린다. ATP가 화학구조물이란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야? 만들 수 있다. 그냥 ATP를 먹으면 힘이 날까? 위와 장에서 전부 분해되기 때문에 입으로 복용하는 방식으로는 세포까지 전달되지 않지만 혈관으로 주입하는 형식의 약물은 개발되었다. 부작용은? 먹으면 심장이 무진장 빨리 뛸 수 있단다. 시스템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몸이 당을 분해하는 단계에서 생기는 변화 속에 항상성을 유지하기한 노력을 패싱 했으니 나오는 결과다. 자 그럼 시스템도 조절하기 위해서 다른 약도 먹어야 한다는 돈 벌기 좋은 결론도 나올 수 있다. 약통에 약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경우는 미토콘드리아에서 ATP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ATP 가 쓰이지 않는 곳은 없다. 에너지 없이 돌아가는 기계를 상상할 수가 있나. 심지어 우리 몸은 3억 개의 세포 공장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공장들 안에서 한 쉬도 쉬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는 에너지가 든다. 30억 개의 DNA 암호를 해독해서 우리 몸을 이루는 블록 조각인 프로테인을 만드는 작업을 포함해서. 우리가 밖에서 만지면 한 덩이지만 그 내부에는 몇백 개로 이루어진 근섬유 조직들을 움직이는데도 필요하고 지금 내가 이렇게 머리를 굴리며 뇌를 쓸 때도 필요하다. 에너지 없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생물을 전공하면 어느 대학교를 가나 나를 그토록 애 먹인 생화학이 들어간다. 인간의 세포가 쓰는 에너지가 바로 화학에너지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럼 공장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 몸의 시스템은 자주적이라 인간 의지로 체온을 조절하거나 호르몬 양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 조절 가능한 것이 바로 호흡이다. 호흡을 통하면 공장의 생산 속도와 관련 기저의 속도를 일정 부분 조절할 수 있다. 김주환 교수를 비롯해서 의사들, 건강 구루들이 말하는 요가, 호흡 명상이 일리가 있는 이유다.
한 때 과학 교육계에 경종을 울리며 유행했던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 인터뷰 영상이 있다.
두꺼운 나무를 이루는 물질이 어디에서 왔을 거냐는 질문에 많은 하버드 학생들이 공기 중 탄소가 무거운 나무 밑동의 원재료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하고 외우는 과학 교육의 문제점이 탄로 났다.
다이아몬드를 이루는 탄소나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의 탄소나 같은 탄소다. 그리고 같은 탄소가 에너지의 원 천이 자 DNA처럼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데도 쓰인다.
인간의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인 질소(N), 산소(O), 인(P), 탄소(C), 수소(H) 같은 원소들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에서 사냥이든 채집이든 농사 든 해서 몸속으로 넣어야 한다. 공기 중 70-80% 이상 존재하는 질소 (N)은 호흡을 통해서 섭취할 수 없다. 몸속에 들어온 산소를 잡아 이용할 수 있도록 돕는 헤모글로빈 같은 단백질 결합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질소를 음식물을 통해서 얻는다. 질소는 우리의 근육, 머리카락, 장기 등을 구성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중요한 원재료다.
지방은 호르몬을 비롯한 다양한 몸의 부분에 쓰이는 재료이자 에너지 저장고로 쓰인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에너지를 만들기 위한 연료를 외부에서 얻기 때문에 먹이를 위한 생존 경쟁은 불가피하다. 지금도 인류는 생존을 위해 치열하기 싸우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처럼 잘 살게 된 나라들은 먹는 것이 넘쳐나서 생기는 문제가 못 먹어서 생기는 문제보다 심각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지구 탄생에서 생물이 탄생하듯 우리가 음식을 통해 먹는 생물이 아닌 무기물은 우리 몸이라는 살아있는 실체, 생물이 된다. 무기물로 이루어진 실체가 없는 다마고치 속 캐릭터는 생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심리적으로 의지한다고 해도 시리도 생물이 아니다. 이런 존재들은 에너지를 이용한 대사 과정을 하지 않고 무기물을 이용해 생물이 되지도 않는다. 이런 가상 세계의 존재들은 가상세계에서 성장, 번식은 할 수 있지만 프로그램되어 있을 뿐 자주적인 시스템이 없다. 또 기계에게 다양성은 오차일 뿐이므로 다양성을 통한 진화는 기대할 수 없다. 생물이 아닌 존재에게 자연계와의 공동체 의식은 없다.
고바야시 다케이보는 '생물은 왜 죽는가'에서 진화초기의 세포는 음식물도 먹을 수 없고, 식물처럼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없으므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기 위한 재료의 선순환을 위해 헌 세포의 소멸이 이루어지도 시스템화했을 거라고 했다. 생물에 관한 글을 쓸 때마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내 머릿 속을 들어와 본냥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되묻는 고바야시의 책을 보고 난 질투가 났다. 그리고 그의 책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노벨상 수상자 일본인 과학자들에게도. 국적이 뭐 중요한가. 우리 다 인류 공동체라고 생각하지만 활짝 웃어지진 않는다. 상보다 상 뒤에 있는 시스템이 부럽다.
연어가 죽어서 새끼들의 먹이가 되는 것처럼 인간은 더 이상 후손의 재료가 되기 위해 죽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인간은 죽어야 할까? 인간의 몸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선택된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 중엔 세포의 무한 반복을 막는 텔로미어나 유전자를 수없이 복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의 축적을 막기 위한 수명의 비밀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생체시계가 다 돌면 에너지를 다 써 버린 인간은 탄소, 인, 질소, 산소, 수소로 흩어져 무생물이 된다. 내 몸 안에 있던 탄소가 무엇이 될지 어찌 알 수 있을까.
불교와 맞아떨어지는 과학이 신기한 것인지, 과학과 맞아떨어지는 불교가 신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간은 죽고 나면 무생물이 된다. 재료의 종류로만 본다면 자연계 입장에서는 처음과 같다. 선순환. 그렇게 항상성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삶은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진화의 최대 수혜자로 최고 지능을 가진 종이다. 진화는 다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다양성은 생물의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 인간이라는 종의 다양성, 인간으로의 진화는 자연계에서 어떤 임무를 띠고 있을까. 지구 위 모든 생물계의 멸망을 연장하거나 생물계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사고가 가능하도록 진화한 종이 아니었을까? 다른 생물과 다른 종특은 단연 생각하는 힘이다. 일부 포유류 중에는 지능을 사용하는 종이 있지만 그중 인간의 지능은 단연코 선두다.
인간에게 생각은 필수일까?
과학 실험 방법에서 표본 집단 조사라는 것이 있다. 동네 민들레를 모두 셀 수 없으니 일정 구역을 정해 그 부분 안에 있는 민들레만 세어 민들레의 분포도를 조사하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실은 좋은 표본 집단이 된다. 물론 지역차라는 것이 있지만. 교실에서 본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주전 틱톡 문제를 놓고 벌어진 토론에서 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한 이이가 시리에게 물었다. 틱톡을 금지하는 게 좋아? 안 하는 게 좋아? 토론이 각자 입장 차이로 물서설 기미가 없자 생각하기에 두 손드는 아이들이 속출한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리 아프게를 외치며.
물론 여기에는 아이들은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생각하라는 걸 생각하기 싫어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맹점이 있다.
생각하기는 진화의 최고 단계에 이뤄져서 나오는 단계인만큼 본능에서 멀고, 에너지도 많이 드는 고난도 활동이다. 인간은 어려운 생각하기를 일임할 인공지능을 개발했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이들은 도구를 잘 사용하면 된다고 한다. 인공지능 로봇을 철저하게 관리할 수 있는 가정 아래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할까? 생존을 위해 쓰도록 진화된 뇌는 인공 지능을 통해 생긴 여유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존 보다 동기부여가 되고 의미 있는 활동이 무얼까? 그 동안의 진화는 생존이라는 처절한 목표를 위해 이뤄졌는데 생존이 아닌 유희를 위한 진화도 일어날 수 있을까? 생존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인간은 생존 공동체와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을까? 다른 종을 먹고 살며 도움을 받으면서도 다른 종의 생존을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착한 인공지능 세상이 와서 생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진화는 인간의 뇌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할까?
인간에게 죽음은 고통인 동시에 의미가 있는 생명 활동이다. 생명이 유한하기에 인간은 다른 종을 포함해서 다른 인간들과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하고 교육, 양육처럼 결국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계의 입장에서 과거에 일어난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문제들을 봐서는 긍정적이지 않다. 당장 수명 증가로 인한 비용만 계산해도 우울해진다. 인간은 종의 다양성, 종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무생물로 돌아가기를 선택할까? 아무 고통없이, 생각할 거리 없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이 되면 인간은 살아 있다고 느낄까?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다른 종은 할 수 없는 배움을 통해 인간의 문화, 문명, 지식을 후대에게 전달해서 인간종과 다른 생물종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다양성의 문을 여는 방법이 뭘까? 모두 교사가 되고 과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가 높은 기질을 타고나서든, 내가 잘 사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성향에서건 후손을 가지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 유전자는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고 거기서 끝난다. 조금 더 긍정적인 성향, 조금 더 이타적인 성향의 유전자만 남는 것이 인간종 전체의 생존을 보면 낫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 우리가 잃은 다양성은? 생물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떡할까? 유전자를 남길 수는 없겠지만 지구상에 유일한 존재인 나의 유일성으로 인간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해야하지 않을까? 혼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다양하기 위해 서로가 필요한 존재가 인간이 아닐까?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삶을 살고 자신의 생명을 의미 있게 쓰면 인간 사회는 자꾸만 다음 세대를 꿈꾸게 되지 않을까? 다음을 꿈꾸게 하는 에너지가 우리한테 필요한 게 아닐까? 이 에너지가 없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인간의 진화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자연계의 변화 속도에 발맞춰서 기술과 문명의 발달을 이루는 운이 주어진다면 50억 년 태양이 수명을 다하기 전 다른 은하계, 다른 행성으로의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는지도.
나는 인간답게 살고 있을까?
(참고문헌)
생물은 왜 죽는가? , 고바야시 다케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