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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과학 습관 05화

004 가운데가 쉬울까?

과학 습관

by 책o습o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흥미로운 논제다.

중간이 되기 위해서 가만히만 있어도 될까?


항상성.

우리 몸은 독하게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뺀다고 해도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어느덧 빠진 살을 차곡차곡 다시 쌓아 놓는다.

바로 우리의 몸이 죽어라고 변화에 적응하길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몸인데 내가 그토록 원하는 변화에 적응하지 않을까?


법적으로는 내 몸이 맞지만 생물학 개념에서 우리 몸은 일방적인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정교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자주적인 존재다.

아니라고? 지금 손가락을 모으고 온 힘을 다해 체온을 1도 올리겠다고 생각해 보자.

이게 된다면 그건 용써서 열불이 나는 것이다. 아니면 갱년기거나.

체온계로 재보면 정상 체온임을 알 수 있다.


자기 개발서 좀 읽은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수익의 자동화라는 말이 있다. 잠자는 사이에도 나 없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잘 갖춰 놓아야 부의 열차에 탑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수억만 년 전부터 존재한 성공적인 자동화 모델이 바로 인간의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심장이 멈출 걱정 없이 잠도 잘 수 있다.

인간의 탄생부터 자동화다. 두 개의 세포를 만나게 하려니 하나의 세포는 작고 날렵하게 움직이게 하고 하나의 세포는 영양분을 많이 가지고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누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선택된 시스템이다. 수를 늘리는 것은 또 어떤가. 적당히 사이즈가 커지면 어떻게 알았는지 주식 라방 같은 것도 없는데 주식 분할하듯 척척 분할한다. 분할이 시작되면 앞으로 할 일에 따라 스스로 전문화도 시작한다. 모두 같은 유전자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근무할 부서에 따라 필요 없는 유전자는 끄고 필요한 유전자만 이용해서 모양도 바꿔가며 자라더니 생산을 맡은 단백질만 딱 골라 만들어낸다. 그렇게 임무가 주어진 세포들은 조직도 짜서 역할이 비슷한 것끼리 모아 부서도 만들어 놓았다. 순환부서, 소화부서, 신경부서, 골격근부서. 역할이 다른 조직 사이에도 의사소통도 해야 하고 교류도 있어야 하니 혈관이랑 신경으로 길도 뚫어 놓는다. 전기, 신경전달물질, 호르몬으로 메시지를 구석구석 보내며 관리를 일임할 대표 관리자로 뇌도 만들어 놓는다. 심장은 뇌의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뇌의 관리 없이 스스로 움직이게 해 놓는 치밀함까지 보인다. 이렇게 생긴 기관들은 성장, 생존, 번식이라는 목표아래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생존을 위해 근육을 갑자기 많이 쓰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니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고 심장이 뛰고 혈액 순환이 빨리 된다. 그러면 몸에 열에 나고 다시 몸은 땀을 내어 몸의 열을 발산시키고 기초 체온을 유지한다.

밥 먹은 지 오래돼서 혈액 내 당이 떨어져 에너지가 필요하면 빈 위벽은 뇌에 신호를 보내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면 인간의 팔다리는 적극적으로 먹이를 찾아 나선다. 이렇게 먹이를 찾은 인간은 혈액 속 당의 수치가 만족할 만큼 높아지면 배를 두들기면서 밥을 그만 먹는다.

어느 부서 하나 농땡이 피우는 것 없이 서로 척척 합을 맞춰서 일을 한다. 게다가 잘했나, 잘 못했나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인체는 항상성이라는 확실한 기준이 있다. 여기서 넘치면 저기서 좀 줄이고 저기서 모자라면 여기서 좀 더 만든다. 몸 안에서 실시간으로 60조의 세포들이 일사불란하게 환상의 하모니가 일어난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하려면 체질을 바꾸라고 이야기한다.

항상성 유지를 위한 시스템의 기준을 바꾸라는 것이다. 원래 조금 먹는 여자였던 것처럼.

쉽냐고? 어렵다. 60조 가까이 되는 인간의 세포들의 공동 목표를 바꿔야 하는데 쉬운 게 이상하다. 하겠다는 의지만 바꿔도 안 되고 대사활동, 식습관 모두 바뀌어야 성공한다. 시스템의 기준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 단기간 다이어트를 하면 항상성의 원리에 의해 무서운 요요가 온다.


문제는 몸이 되돌아갈 수 있는 항상성의 역치를 벗어난 순간, 가역성에서 불가역성으로 돌아선 순간이다.

인간의 몸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암세포가 만들어졌다 없어졌다 한다. 세포분열 단계에서 시스템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암세포 수가 관리 불가능할 정도로 증가할 때 병원에서 암진단을 받는다.



미국 살면서 내가 문화적 차이를 심하게 느꼈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다.

우리 집 막내를 가르치던 발레 선생님이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났더니 갑자기 걸을 수가 없더란다.

그래서 양의를 찾아가고 여러 가지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어 혹시나 싶어 침을 맞으러 한의사한테 갔더니 정말 효과가 있더란다.

그러면서 나한테 하는 말이

" 네가 동양의학을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지만'

과학을 전공한 이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동양의학의 원리를 서양식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과학적이지 않다는 발언은 외계인 존재에 대한 논의와 같은 급으로 취급되었다.

한국 사람들은 오랜 시간 한의학을 접해서 두 의학의 학문의 장점을 모두 취하는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아직도 많은 서양 사람들한테는 한의학은 거의 미신급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한의대를 간다고 하면 그럴 거면 그냥 의대를 가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에도 비싼 한약 먹지 말고 그냥 종합비타민제 먹으면 되다고 말하며 한의학을 불신하는 양의도 있다. 한국에서의 한의학은 그래도 미신 정도는 아니다. 실제로 한약을 성분을 이용해 화장품, 신약 개발에 성공한 예도 있고, 최근 한의학계도 여러 가지 서양 과학 방식을 이용해서 한의학과 침의 효능을 데이터로 증명하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나는 침의 물리적 자극이 전기신호로 소통하는 신경세포를 자극해서 몸 전체 시스템에 관여하는 원리로 치료가 가능한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다만 양생법, 혈을 이용한 치료법이 매우 과학적이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보완된 부분, 병에 따라 더 효과적인 치료법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맞는지 궁금해서 찾아본 고미숙 작가의 동의보감에는 전기신호를 통한 신경세포와 침 치료와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허준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전기 신호를 보내며 반짝이는 신경세포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한의원에 가면 목이 아픈데 손이나 발에 침을 놓는다거나 당장 아픈데 일주일은 약을 먹고 와보라고 한다. 병원에 가면 목이 아프면 정확하게 목사진을 찍고 목에 레이저를 쏘아 댄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서양의학은 문제 푸는 법, 기출문제를 콕콕 집어주는 단기 속성과외나 문제집이라고 생각하고 동양의학은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시험 전날 고전 읽어서는 점수가 잘 나올 리가 없고 수험서만 풀어서는 이해의 깊이가 낮다. 그래서 암을 치료해도 재발하니 문제의 근본을 찾아야 한다고 한의사들은 말하고 불씨를 안 끄고 근본만 찾다가 집 전체를 태운다고 양의는 말한다. 책과 읽고 문제집도 풀어야 입시에서 승리한다. 서양의학은 현상의 원인을 점점 작게 집중해서 이해하고 고치는 방식, 동양의학은 현상의 원인을 전체를 이해하는 것부터 출발해서 큰 것 속의 작은 것을 고치는 방식으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동양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같은 연역식, 서양은 밑에서 위로 펴져 나가는 분수 같은 귀납식 사고를 한다는 말이 나왔나 보다.


치과에 가면 어떤 치과의사는 이가 부실하면 대번에 뽑고 임플란트로 하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치과의사는 뿌리라도 살려보자고 한다. 어느 산부인과 의사는 무조건 자궁을 들어내라고도 하고 어느 산부인과 의사는 잘 치료해서 보존하는 것도 고려하자고도 한다. 같은 환자인데 의사의 견해는 왜 다를까?

장기를 단순히 몸의 부분으로 보는 것과 장기들이 유기적을 모여서 몸이 이뤄진 것으로 보는 차이 아닐까. 장기를 몸의 부분으로 보는 것은 자동차 부품 떼듯 떼어내고 새 걸로 갈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장기가 모여서 몸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면 장기들이 서로 주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명의라면 장기와 몸 전체와의 관계도 살피고, 위급한 세부적인 문제는 정확하고 빠르게 진단해서 치료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노벨 수상자인 폴 널스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시드니 브레너의 말을 인용했다.

"We are drowning in data but thirsty for knowledge.'

이어 폴은 너무 많은 생물학자들이 자세한 생화학 사건을 기록하고 묘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도 정작 그 의미는 간과한다고 했다. 이 모든 데이터를 의미 있는 지식으로 바꾸는 것은 생물이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 역시 과학을 한 것인지 확신이 없었구나.



인체를 포함한 자연계는 잘 짜인 시스템을 이용해서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인간은 지구의 항상성에 끊임없는 도전을 하고 있다. 현재 인간은 자연계 시스템 속에서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선택적으로 긍정적인 누구는 항상성 원리에 의해 인간이 예측불허로 들쑤신 변화도 자연적으로 잘 회복될 거라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끊어져버린 고무줄처럼 불가역적인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몸이 소우주를 방불케 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이용해서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뭘까?

같음을 유지하려는 몸도 자연도 태양계도 변한다.

변화가 필연이라면 굳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이유는 무얼까?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혼자 가지 않고 같이 가기 위해 변화에 대비한 시스템을 만들 시간.

중간이 이렇게 귀하다.



그래서 중심 잡고 사는 것이 어려운 건가?



(참고자료)

What is life, Paul Nurse

동의보감,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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