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합성 단원에 들어가면 내가 가르치던 고등학교 아이들은 콩을 발화해서 화분에 심고 키운다.
호흡과 광합성이 일어나는 것을 한꺼번에 관찰하기 위해서다.
유전자 조합을 하는 시대에 이게 웬 전근대적인 과학실험이냐고?
교육 재정, 안전, 아이들의 흥미, 개인별 수준차 이런 거 다 생각해서 차 떼고 포떼고 남은 선택지다.
선진국인 미국이나 한국이나 광합성에 대한 내용엔 별반 차이 없다. 적어도 4명이서 현미경 하나 가지고 만지작 거리면서 잎 뒤에 있는 숨구멍(스토마)도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이렇게 공부해서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과학자를 키울 수 있냐고?
그렇다면 미래적으로는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식물이 광합성을 해서 인간의 먹거리를 만드는 방법은 변하지 않았다.
5살 둘째가 유치원에서는 하는 같은 실험을 한다는 것 자체보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화분에 물을 주라니까 한 녀석이 어디다 주냐고 묻는다. 처음엔 나를 골리나 싶었는데 진짜 모른다. 지역 교육 수준이 낮은 거 아니냐고? 내가 가르쳤던 학교는 미중서부 지역에서 중산층이 사는 지역에 있고 학교 순위는 25000개의 공립학교 중 1000위 정도의 수준이다. 공부를 못하는 녀석도 아니다. 나름 성적에 신경 쓰는 녀석이다. 되려 성적에 신경 써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런 건 시험 문제도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인구의 80프로가 농부일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집에서 식물을 키워본 적이 없는 요즘 아이들한테는 가능한 일이고 그야말로 안물안궁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다녔다면 집에서 안 키워도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가르친다고 다 배우는 건 아니라는 거, 배운다고 다 이해하고 기억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미국 아이들 중에는 어렸을 때부터 도시락을 스스로 싸 오는 아이들이 많다. 초등학교 3학년만 돼도 식빵에 잼 바르고 햄 넣어서 가져오기 시작한다. 고등학생쯤 되면 학교에서 파는 피자, 햄버거 사 먹는 아이들도 많고 여학생들 중에는 작은 지퍼락 백에 크래커 한 줌 담아 오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먹는 것 중엔 원재료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 잘게 갈고 다지고 보기 좋게, 먹기 좋게 만들어 놓아서 원재료가 땅에서 왔다는 걸 연결하기가 어렵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고기 모양 치즈맛 과자도 물고기는 안 들어간다. 공장에서 만든 맛이 기가 막힌 물질과 땅에서 자란 밀과 사탕수수, 옥수수, 콩 같은 농작물이 만들어낸 탄수화물, 단백질을 잘 섞어 만들어진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자연계에 존재하기 위해 진화한 기능이 바로 광합성이다. 스스로 연료를 만들어 내는 자급자족. 초록잎 뒤면에 있는 엽록체에서 공기 중에 존재하는 이산화탄소와 빛 에너지를 연료 삼아 생물들의 대사 과정에 필요한 당을 만들어 낸다. 식물마다 당을 여러 개 연결한 전분, 두 개 연결한 설탕처럼 종류도 입맛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 낸다. 인간은 처음엔 채집을 하며 먹을 것을 얻었지만 인간의 숙명, 생각하기에 이른다.
꼭 돌아다녀야 해? 이사도 힘든데 그냥 한 군데서 사는 방법 없을까?
그래서 탄생한 것이 농경문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농사의 어려움, 식량의 불균형, 맛에 대한 인간의 무한한 욕망
농사의 어려움은 내가 직접 경험해 봤다. 큰 꿀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동네에서 운영하는 공동 텃밭을 한철에 3만 원 정도로 분양받아 농사, 아니 흙 놀이를 시작했다. 농사짓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한풀이를 그렇게 했다. 처음엔 한 두 개로 시작한 품종이 나중엔 땅콩까지 심었다. 땅콩을 수확했다는 건 아니다. 그냥 심어봤다. 씨부터 시작한 녀석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그나마 모종이 성공적이어서 두 번째 해에는 아예 다 모종으로만 사니 초기 투자 비용이 배보다 큰 배꼽이 됐다. 내 농사의 철칙은 농사가 끝나고 나서 남는 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였다. 집에 농기구를 보관할 창고도 없고 내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낫 하나가 전부였고 나중에 도저히 안 돼서 농사를 반대하는 남편 몰래 삽 하나를 더 샀다. 우리 밭은 주위에서 주워다 꽂은 나뭇가지로 받침대가 만들어졌다. 내가 누워서 휘돌면 꽉 차는 땅덩어리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심다 보니 고랑 같은 개념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좋아하는 번호만 보고 밭을 골랐기 때문에 물을 주는 수도까지 양동이를 들고 물배달을 해야 했다. 아프리카에서 우물 파는 심정이랄까. 우리 집 밭에는 담장도 없었다. 옆 집 밭들이 다 돈 들여 담장을 세워주니 네 면중 두 면은 담장이 있었지만 두 면은 길가라 담장이 없던 탓에 동네 토끼며 짐승들 구내식당이 되었다. 아이와 함께 키우는 것이라 제초제 뿌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더니 코딱지 만한 땅에 잡초 뽑느라 허리를 필 틈이 없다. 게다가 유기농 한답시고 동네에서 제공하는 공짜 말똥을 퍼다 여기 저거 올려놓았더니 냄새와 파리가 따라붙는다. 영양제와 제초제를 뿌려 키운 옆 밭들 가지는 내 팔뚝만 한데 내가 키운 가지는 작꿀이 손만 하면 제일 큰 것이었다. 그나마 성공적인 수확물은 파, 깻잎, 고추, 피망이었고 호박, 오이도 1주일에 번갈아 한 개씩 딱 우리 식구 먹을 만큼 수확했다. 큰꿀이가 딸기를 심자고 노래를 불러서 심었지만 딸기가 생기기 무섭게 채가는 녀석들 때문에 3년 내내 구경도 못해봤고, 한번 심었던 고구마는 뭐를 잘 못했는지 땅 속 줄기 따라 주렁주렁 열려야 할 게 한 군데서 한 덩이로 커져서 무서워 못 먹을 정도였다. 큰꿀이가 뭘 모를 때는 개구리 잡고, 콩 털고, 고추 따는 재미로 했는데 3년 차 됐을 때는 꾀가 나서 잡초를 안 뽑아서 결국 밭에서 쫓겨났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많이 생겼지만 먹고살자고 했으면 난 진즉에 굶어 죽었다. 농사가 끝나면 수확물 말고는 되도록 자연에 해 되는 것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 파마컬처다. 아만다 리틀이 쓴 인류를 식량 위기에서 구할 음식의 모험이라는 책에 나오는 버지니아 주 크리스와 애니는 내가 말한 원칙과 비슷한 옛날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데 그들이 파는 닭은 2019년 당시 1kg에 만원 꼴이었다. 2024년 내가 시장에서 사는 닭 가격은 1kg에 5천 원도 채 되지 않는다. 책을 읽은 후 그들이 농사로 먹고 사는지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
식량의 불균형과 농사의 어려움을 해결하겠다고 두 팔 걷어붙인 또 다른 사람은 빌게이츠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은퇴한 빌 게이츠는 전 부인과 함께 재단을 함께 건설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기근 지역을 돕기 위한 agribusiness(농업+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 최고 부자인 그들의 지원 규모가 어마어마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놀랐던 연구 주제는 식물의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최대치로 당을 생산할 수 있는 종을 만드는 연구였다. 에너지를 만드는 미토콘드리아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건 차에 엔진을 두 배 큰 걸로 다는 것과 같다. 빌게이츠도 생물시간에 식물을 키우며 광합성을 배웠을까? 지금 아이들이 배우는 내용과 별 차이가 없었을 텐데 이런 놀라운 생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화분에 물을 주면 생각이 날까? 실험의 중요성을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실험이 다가 아닌 건 확실하다.
어느 날 보기엔 똑같은 풀이라도 당이 훨씬 많은, 두 배의 에너지를 낼 수 있는 포만감을 기준으로 먹은 소들은 어떻게 될까? 인간의 성인병과 같은 질병을 달고 살게 되지 않을까? 같은 양을 먹는 다면 소의 크기는 어떻게 될까? 식물이 빨리 자라는 속도를 막을 수 없으면 어쩔까? 미친 속도로 돌아가는 식물 공장에 연료를 대는 흙의 수명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래서 이렇게 인류를 위하는 빌게이츠 식의 헌식적 노력을 우려하는 이들도 만만치 않다.
놀라운 것은 사람들이 백신이 없어서 죽어나가고, 먹을 게 없어서 죽어나가는데 아무거라도 되는 것부터 해야지 자연계 전체 시스템의 항상성을 운운하며 시간 낭비할 수가 없다는 빌게이츠의 결단력이다. 물론 나와 다르게 똑똑한 빌게이츠는 아무거라도 하진 않는다. 빌게이츠가 강조하는 혁신성. 변화를 두려워하며 주저하지 말고 판을 뒤집을 만한 거대한 변화를 통해 혁신을 이루어야 그나마 조그만 변화라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죽게 생긴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섰는데 의료계 시스템을 위한 파업으로 진료를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은 의사를 보면 부모는 어떤 심정일까? 아프리카의 과학자들은 배가 부른 선진국에서 하는 유전공학에 대한 논의가 배부른 소리라고 한다. 그런 걸 가르쳐서 죄책감을 들게 하면 다 굶어 죽는다고 펄펄 뛴다. 빌게이츠는 아프리카에서 영웅이다. 빌게이츠가 아이 부모의 심정으로 의사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오는 그런 심정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동료들의 뜻을 뒤로하고 눈 앞에 생명을 구할 수 밖에 없었던 의사같은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 나로서는 알 길이 없는 빌 게이츠의 진짜 의도가 어느 쪽이든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설득력 있는 해결책처럼 보인다. 빌 게이츠 아저씨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도 함께 생각하면 좋겠는데 별 관심이 없는 걸 보면 속도도 영 성에 안 차고 수지 타산이 안 맞는 건가 싶다.
인간이 손댄 게 문제라면 천연이면 무조건 다 좋을까? 재례식이면 다 좋을까?
내가 좋아하는 홈런볼을 만든 해태제과에서 근무했던 최낙언 작가의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을 읽는 내내 작가가 식품회사에서 마음고생 많이 했구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는지 책까지 쓸 정도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이 만든 첨가물, 가공식품은 인간이 먹는 데는 때로 천연 식품보다 안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GMO 식품이 경쟁력이 있고 먹어서 인체에는 유해하지 않다는 의견도 동의한다. 과학 덕분에 우리는 훨씬 편하게 살고 있고 재례식으로는 투명하기 어렵던 많은 부분이 관리 가능한 제품을 쓰고 있는 것도 맞다. 다 닦아져서 진공포장되어 나오는 야채들, 먹기 좋게 1분씩 담아진 밀키트들, 1분 30초면 밥 태울 걱정 필요없는 햅반들. 대부분 다 깨끗한 공정을 거쳐 손쉽고 빠르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선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다. 게다가 한국처럼 먹는 거를 중요시 하는데다 땅 덩이리가 작고 식량의 수입 의존율이 70%를 넘는 나라는 식품 가공 기술이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이 아닌 자연의 입장에서 인공 첨가물, 가공 식품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선순환되지 않은 방부제, 화학물질, 배송에 드는 탄소, 포장물질을 생각해 보면 천연식품이 완전히 만들어 낸 가공식품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천연 식품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가공한다면 그게 천연 식품인지, 가공 식품인지 애매해지겠지만.
그렇다면 왜 동굴에 살지 그러냐고? 그래서 정말 구석기 다이어트라는 게 있다. 내가 제일 먼저 생각해내는 영광을 차지할 리가 없다.
어렵게 개발한 편하고 깨끗하고 믿을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굳이 구석기 시대처럼 살아야하는 걸까?
그럼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제로 웨이스트, 아나바다, 퍼머컬쳐가 같이 공유하는 철학은 이용하고 즐기되 나오는 것을 최소한으로 하자. 특히 나오는 것이 원래 자연으로 돌릴 수 없는 영구적인 것이라면 배출하지 않거나 줄여야 한다는 게 요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주일이면 가득 차는 쓰레기통을 보면 가능한 건지 싶다. 현재 과학으로 완전한 유에서 무가 불가능하면 적게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르다. 소식도 그중 하나의 방법이다.
분야를 통틀어 심지어 종교계까지 부작용이 없어 보이는 공통적인 의견은 소식이다.
최낙언 작가도, 동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도, 제인 구달도, 각자 다른 이유로 소식을 이야기한다.
나는 자기는 손해 보면서 이타적인 마음에 기댄 해결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식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다.
돈을 아낄 수 있다. 건강도 챙길 수 있다. 자연도 챙길 수 있다. 그런데 딱 하나 포만감이 아쉽다. 대충 해도 3대 1인데 저 하나를 버리기가 쉽진 않다.
내 친구는 어린 시절 김치 세 점을 내줬던 친구 엄마 흉을 지금도 본다.
인심이 각박하단다. 그래도 집에 온 손님이 모자람을 느끼도록 주면 안 된다며 핏대를 세운다.
소식을 하면 쉬운 다이어트인데 인간은 희한하게 더 먹어서 하는 다이어트를 하려고 한다. 다이어트 보조제를 먹고, 먹으면서 살 빼는 것을 개발한다. 그런 걸 개발해야 돈이 돌고, 그런데 돈을 써야만 사는 맛이 나는 것일까? 경험처럼 선순환이 가능하면서도 돈 쓰는 맛도 느낄 수 있는 거 없을까?
싸게 많이 먹으려고 하는 시대는 끝났다. 근대화 전에는 기술이 무르익지 않아 근근했다. 전쟁 후에는 미군이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으면 횡재였다. 아등바등 악착같이 일궈 낸 경제 성장으로 먹는 거 걱정 없이 산지 이제 50년 조금 넘어 이제는 먹방을 찍어대며 넉넉하게 먹고사나 싶더니 이젠 기후가 말썽이다. 모든 것을 대량 생산한 덕에 태양, 물, 공기, 흙 공짜로 써가며 많이 키우던 시절은 끝났다고들 한다. 기후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 기후에 가장 민감한 농부가 많은 건 왜일까? 리틀의 책에서 하룻밤 서리에 사과밭을 모두 잃은 사과 농부에게 왜 농사를 짓냐고 했을 때 농부는 신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다. 하늘이 땅을 맡긴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이 변했다는 말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혹한 소식이 아닐까.
우리 집 냉장고에는 먹는다고 먹는대도 유통기한이 지나거나 시들어서 못 먹고 버리는 것, 맛없어 버리는 것들이 속출한다. 남겨서 버리는 것은 그냥 그 음식만 버리는 게 아니라 음식에 들어간 모든 과정, 농부의 에너지, 물, 배달하며 쓴 기름, 포장, 전부 다 포함해서 버리는 것이다. 조금 덜 먹는 것, 남기지 않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데 나한테 빌 아저씨를 탓할 자격이 있을까. 의식 있는 소비문화로 바꾸는데 필요한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 있을까.
공수래공수거란 말은 기원도 모를 때부터 존재했다.
한국에는 1976년 발간되고 이미 오래전에 유행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란 책이 있다.
그리고 정리의 발견을 쓴 일본의 곤도 마리에를 거쳐
현재 미국에는 미니멀리즘 전도사인 조슈아와 라이언은 The minimalist라는 다큐를 시작으로 해서 팟캐스트에서도 승승장구 중이다.
재미난 건 덜 가지는 게 미니멀리즘인데 인간은 어떻게든 더 갖도록 방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많이 있지만 많이 없는 것 같은 정제미를 위해 사이즈, 색깔 맞춰 새 정리함을 구매하고 캡슐옷장을 만들겠다고 멀쩡한 옷을 내다 버린다. 그뿐인가 갑자기 자극받아서 멀쩡한 수세미와 세제를 버리고 친환경 세제로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물론 모든 게 계기가 돼서 궁극적으로는 덜 사고, 덜 쓰면 도움이 되겠지만 무조건 사거나 만들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우리 에너지를 쓰는 방향을 바꿔야 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늙지 않는 약을 개발할 때 누군가는 생물학적으로 완벽하게 분해되는 약통을 개발하면 어떨까? 누군가는 최신형 로봇청소기를 만들 때 누군가는 폐지로 만들어진 청소기를 개발하면 어떨까?
이런 시도들이 있었지만 한구석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는 마음.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유에서 무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만든다고? 할수록 내 곳간이 점차 비어지는 거라고?
그 심리적 헛헛함을 채우는 것으로 자유는 너무 값싼 것일까? 희망은 너무 위험한 것일까?
정말 우리가 인력이 없어서, 연구비가 없어서, 지원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되돌리는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는 게 맞는 건가 싶다. 의식 있는 소비문화로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방법은 정말 없을까?
오늘은 내 배를 반만 채울 수 있을까?
(참고자료)
빅히스토리 프로젝트
https://www.oerproject.com/Big-History?WT.mc_id=2022041000000_Reg_BHP-SEM-S3Mg-S3mGn&WT.tsrc=BHPSEM&gad_source=1&gclid=CjwKCAjw26KxBhBDEiwAu6KXt9IDf9vvO0ue2BL9L6aRzMStoWqnRg_P5YlJyOr Vl5CV79esIEQDSxoCk5gQAvD_BwE
Bill Gates has radical plans to change our food. What’s on the menu?
https://www.localfutures.org/bill-gates-has-radical-plans-to-change-our-food-whats-on-the-me nu/
식품에 대한 합리적인 생각법, 최낙언
인류를 식량 위기에서 구할 음식의 모험가들, 아만다 리틀
The book of Hope, Jane Good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