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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과학 습관 08화

007 지켜준다고?

과학 습관

by 책o습o관

이제 막 태어난 귀여운 희귀 새의 아기새가 뒤뚱뒤뚱 강 옆을 걷고 있다.

강물에 번쩍이는 눈 두 개가 보인다. 배가 고픈 악어다.

그리고 숲 뒤엔 카메라와 총을 든 희귀 새를 어렵사리 따라다닌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이 있다.

악어가 뛰어올라 새끼새를 먹으려는 순간에 시간이 멈췄다.

당신이 촬영감독이라면 어떻게 할까?



미국은 개들의 천국이다. 개 용품이 슈퍼마다 한 코너씩 자리 잡고 있고 우리 집 앞 길에 있는 집 10채 중 개가 없는 집은 2집뿐이다. 아이들이 다 장성해서 떠나고 난 중년부인들은 만나서 개 이야기를 자식 이야기하듯 한다. 내 주변엔 집에 개 9마리를 키우는 전 직장동료도 있고, 뱀, 앵무새, 도마뱀 온갖 종류의 애완동물이 합해서 10마리가 넘는 친구도 있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개 9마리의 엄마인 C와 함께 앉아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에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려던 말이 급류에 빠져 허우적 대고 총에 맞아 고꾸라지는 장면이 나오자 C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그렇게 말한다.

"난 저 위에 군인이 죽는 것보다 밑에 탄 말이 죽는 게 더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그녀는 점심으로 소고기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를 먹는다.


대학원시절 일주일에 두 번 박스가 배달 온다. 그 안에는 손바닥만 한 생쥐들과 팔뚝만 한 실험용 쥐 래트가 들어있다. 나는 살아있는 동물을 가지고 하는 in vivo 실험이 아니라 동물의 세포를 이용해서 페트리디쉬에 하는 in vitro 실험을 했기 때문에 세포가 필요하다. 그것도 성장이 끝나지 않은 새끼의 뇌세포. 임신한 동물은 민감하다. 쥐도 사지에 몰리면 사자 콧등도 물 수 있다. 그래서 마취통에 넣기 위해 쥐꼬리를 잡으면 어떤 쥐는 뱅글뱅글 빠져나가려고 몸무림을 친다. 한 번은 얼마나 죽기 살기로 도는지 꼬리 피부가 벗겨지기도 하고 무는 쥐도 흔해서 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 마취통에 들어가 축 늘어진 쥐를 꺼내고 쥐의 목뼈를 위로 당겨 분리하는 경추탈골을 해서 혹시 남았을지 모르는 숨도 끊는다. 혹시라도 깨어나면 고통이 너무 심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어미배에서 새끼쥐를 꺼내고 새끼의 뇌세포를 체취한다. 어떻게 뇌세포를 얻는지는 생략하는 게 좋겠다. 이렇게 키운 뇌세포를 가지고 치매, 파킨슨병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기도 하고, 노화의 비밀을 연구하기도 하고, 줄기세포나 약의 기전도 연구한다. 신약이 조금의 효과라도 있다고 하면 전화통이 불이 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인간은 과학의 산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최근 본 아이들 영화 주인공이 과학자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악화한 실험용 햄스터다. 요즘 들어 동물권리 보호 운동가들이 실험실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이야기가 소재로 자주 쓰인다. 그래서 실험실에 키운 세포 모델에 실험을 하자,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모델에 실험을 하자는 대안도 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동물의 생명을 위해서 그나마 완벽한 생물 시스템에 안정성을 검증하지 않은 약을 먹일 수 있는 차가운 머리를 가진 공평한 부모가 몇이나 될까?

실험실에 있는 연구자들이 동물을 싫어하거나 학대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서 개를 키우는 연구원들도 많고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집안이 불교이던 선배네 부모님은 쥐를 위한 불공을 드리신다고 했다.



인간이 뭔데 동물의 생명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거냐고?

애완동물은 공생이 확실하다. 인간은 애완동물이 주는 감정적인 보상을 받고 사료와 잠자리를 제공한다. 인간도 얻는 게 있고 동물도 얻는 게 있다.

그럼 가축이나 실험용 쥐는? 고기를 얻는 대신 먹을 것도 주고 종도 번식하게 해 주긴 한다. 인간적인 대우는 안 하면서 공생이냐고 문제를 제기할 순 있지만 그건 인간의 잣대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진딧물을 키우는 개미처럼 가축을 기르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는 공생이다.

공생이긴 해도 애완동물도 가축도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인간이 필요에 의해 길들인 거지 동물과 합의하거나 동의를 받아 키우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까지가 동물의 영역, 본능인 거야?

도대체 사고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은 어떤 거야?

최재천 교수님 같은 분들이 동물을 연구하는 이유 중 하나다. 물론 동물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동경으로 일할 수도 있다. 동물학 안에도 다양한 새, 곤충, 유인원처럼 세분화되고 그 안에도 생태학, 행동학, 수의학처럼 관련된 분야가 다양하다. 인간은 동물의 독, 거미의 다리구조, 달팽이 진액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동물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동물을 연구하는 것은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훈련되어 가려진 인간이라는 동물의 본능을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복어의 가시처럼 문어의 변장술처럼 다른 종의 생존 법칙을 배우는 것이 인간의 최대 무기다. 배우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최교수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여전히 생물계에서 나의 관심은 인간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최재천 교수님이 쓴 동물과 인간이라는 책은 신선했다. 동물들의 이야기가 요술보따리 마냥 술술 나오는 것도 그렇고, 동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도 그렇다. 너무 재밌어서 돈 안 받고도 연구했을 테고 다시 태어나도 동물학자를 할 것 같다는 대목에서는 그런 동물학자가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한테 희망이 될 것 같아서 참 다행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계로 관심이 편협한 나는 동물과의 최소한의 접점은 지구에 같이 살고 있는 존재로의 상생 파트너다. 나도 생존을 해야 하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에 내 생존을 그들의 생존 위에 놓는다. 나같이 이기적인 인간도 그들의 생존은 나에게 도움이 되고,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발상에서 그들의 원칙, 영역, 생명을 존중한다.



인간이 사고할 줄 알고 지능이 우수하다고 해서 동물이기를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동물이기를 포기하면 생존이 어렵다. 인간은 동물이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원리로 전쟁을 하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공존을 선택한다. 동물이지만 인간이기에 전쟁 중에 인간애를 피워서 적을 살려주는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한다.

희귀 새를 잡아먹는 악어를 보면서 지옥 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악어도 안 먹으면 죽기 때문에 먹는다. 먹이 사슬로 얽힌 자연계 시스템의 원리다.

인간이 동물이란 전제를 부정하고 이성적인 전제로만 인정하면 고기를 먹으면 안 되고, 동물 실험을 한 약물, 백신의 혜택을 받으면 안 된다. 같은 원리로 물고기도 식물도 먹으면 안 된다. 물고기, 식물은 뭣 때문에 고기보다 하위 생물로 취급되어야 할까? 먹이를 혼자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은 결국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옳든 그르든 먹어야 하고 자연계에서 먹이를 얻어서 먹고사는 이상 자연계 시스템의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고기를 먹는다고 윤리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먹지 않는다고 고매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럼 생존이 아닌 그 이상, 멋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재미를 위해서는? 돈을 위해서는?

에스키모인이 동물털 옷을 입는 것과 뉴요커가 밍크옷을 입는 것을 다를까?

닭을 키워서 먹는 것과 투계로 돈을 버는 것은 다를까?

다른 생물을 이렇게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왜 괜찮고, 왜 괜찮지 않을까?

동물에게 사냥은 힘이 많이 드는 일이고, 생존에 직결된 일이라 다양한 목적으로 다른 동물을 사용하는 생물은 인간 밖에 없다. 동물과의 공통 영역은 아니다.



더 많이 먹고 더 싸게 먹기 위해 잔인한 환경에서 키우는 소, 돼지, 닭들을 키우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옳고 그른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인간의 돈에 대한 욕망과 똑똑한 머리가 만난 결과물이니 일리가 있다. 대량 생산은 필수일까 선택일까. 문제는 사회 전체 시스템과 싸우며 파마컬처처럼 필요한 만큼만 소규모로 윤리적으로 키운 비싼 고기를 사 먹으며 가벼워지는 자기 주머니를 감내할 개개인이 얼마나 될까. 돈도 생존의 일부라는 인간 사회의 법칙을 무시할 수도 없다.

지구에서 축산업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막대해서 채식을 하겠다면 찬성이다. 적더라도 길게 먹기 위해 양만 줄이겠다고 해도 찬성이다. 도저히 고기는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힘이 센 동물이 힘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것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동물의 권리를 위해서? 그건 잘 모르겠다.



한국도 미국만큼 애견강국이 돼 가고 있음을 강형욱 훈련사 인기를 보며 느낀다.

인간이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사회 계약설로 설명되기도 하듯 상호 존중에 의해서다. 가끔 의심스러워도 인간은 그게 가능한 지능이 있다. 그럼 인간이 동물을 존중해 주면 동물도 존중해 줄까? 강훈련사의 영상에 소파 위에 올라서 주인이 오면 물거나 위협적으로 짖는 강아지를 보며 눈물짓는 애견인들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미국에서는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개가 짖으면 눈물이 쏙 나오게 혼내는 주인들 때문에 지나간 내가 되려 미안해질 정도이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개도 앉고 싶은 곳에 앉고, 짖고 싶을 때 짖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과의 관계를 위해 늑대처럼 산속에서 뛰어놀고 사냥을 하던 본성을 버린 개를 보면 인어공주가 생각이 난다. 왕자님과 함께 살기 위해 지느러미를 버리고 물에서 땅으로 나온 그녀. 그래서 나는 개를 못 기른다. 기르면 안 된다. 길들여진 개에게 인간에 대한 복종은 존중의 표현이다. 서로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상생할 수 없다.



1995년 엘로우 스톤에 사는 늑대가 멸종위기를 맞자 인간은 늑대보호정책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급격히 늘게 된 늑대는 주변 축산 농장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사슴들의 수가 급감했다. 우리 인체처럼 다양하게 얽힌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정책의 좋은 예로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다. 인간의 몸처럼 생태계도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이 있다. 그래서 제인 구달은 스스로를 과학자가 아닌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부른다. 그녀의 책 The book of HOPE에서 사실을 모으고 데이터화하는데 집중하기보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연을 이해하려고 하는 게 자연주의자라고 정의한다.




난 그저 내 생존에 필요한 먹이들이 살 곳은 보장해 줘야 나도 살 수 있기 때문에 자연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다. 배짱도 호기심도 없어 다른 생물들도 그들의 법칙대로 잘 살길 최대한 멀찍이서 기원한다.

인간의 이타심, 동정심, 측은지심에 입각해서 힘없고 불쌍한 약자인 동물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어딘가 있을지 모를 선한 마음에 의존해서 앞날을 논의하기엔 선한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내 의지가 너무 약하고 내 배부르고 나 편하고자 하는 마음에 팔랑거리는 귀는 얇디 얇다.

나는 생각한다는 것 말고는 의지도 약하고, 혼자 살 수도 없고, 싸우는 재주도 없는 털 없는 동물인지라 본능에 충실한 이유가 더 설득력이 있다. 내 생존을 위해 할 수밖에 없는 다른 종들의 영역에 대한 존중을 감히 다른 생물, 자연을 지켜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참고자료)

인간과 동물, 최재천

The book of Hope, Jane Good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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