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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과학 습관 09화

008 좀 까보실라우?

과학 습관

by 책o습o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시장에서, 학교에서 뜬금없이 핸드폰 하나 세워 놓고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면

열에 아홉은 틱톡을 하고 있는 거다.

틱톡을 하지 않는 어른들 입장에서는 저게 무슨 낯부끄러운 뜬금포인가 싶은데 그 시장성이 어마하다.



미국에서는 내년 1월부터 틱톡을 금지하겠다는 법안을 놓고 말이 많다.

이유는 틱톡의 모회사인 BYTEDANCE가 중국계 회사라는 것이고 틱톡계정을 통해 들어간 수많은 알고리즘, 개인 신상 정보, 위치 정보, 계좌 정보가 공산국가인 중국 정부에 의해 남용될 소지를 우려해서라고 한다.

틱톡 금지 입장은 멋모르는 철부지들과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순진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금지 반대파은 죽더라도 내가 죽고 강한 놈은 살아남으니 걱정 말라는 생존 경쟁의 원칙 손을 들어준다.

미국 내부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국가 안전을 놓고 첨예한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희한하지 않은가?

지켜주겠다는데 보호받고 싶지 않다는 미국인들이. 그들이 자유의 대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그토록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것인지 궁금해서 아이들과 토론 수업에서 난 진화를 경험했다.

물론 10대들은 안보 위협 따위 콧방귀도 안 뀐다.

토론 수업 중 한 아이가 하는 말이

"더 좋은 앱을 만들면 되잖아요? "

어쭙잖게 공산주의, 민주주의 이런 틀에 박힌 연설을 하려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규제가 아니라 더 다양한 앱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 철저하게 경쟁에 붙여서 생존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고? 아이들이 나보다 낫다.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이라는 책에서 진화의 원리인 다양성과 최적의 것이 살아남는 생존 법칙으로 다양한 사회 현상을 생물학에 기초해서 설명한다.


최근 한국학교에서 영상 만들기 수업을 진행했을 때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용한 비디오 편집 앱은 캡컷이었다. 틱톡 맞춤형으로 제작한 비디오 영상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하고 유용하다. 그런데 캡컷 역시 모회사가 BYTEDANCE다. 찾아본 다른 영상 편집툴은 불편하거나 아니면 중국산이다.

최근 한국을 강타하고 있는 알리, 테무 역시 중국계 회사이다. 가격 경쟁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

아이들이 보는 영상도 영상 제작사의 배경 문화에 따라 언어의 수준, 내용, 색감이 달라진다. 마음에 안 드는 채널을 차단해도 비슷한 이름으로 끝도 없이 나오고 알고리즘에 뜬다.

체제가 달라서 문제라면 이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 모든 미디어, 영상들의 배후를 일일이 확인해야 할까?

속이는 방법도 많은데 원산지, 생산국을 반드시 기재하면 관리가 가능할까?

미국 입장에서 북한은 안 된다면 남한은?

어느 나라 것은 괜찮고 어느 나라 것은 안 괜찮은지 어떻게 결정할까?

그렇게 나라별로 정해도 괜찮은 걸까? 이렇게 사상 따라 걸러져 다양성을 잃은 생태계는 진화할 수 있을까?



결정할 것도 논의할 것도 많아 보인다.

미국 역사에서 빌게이츠도 , 저커버그도 불려 나간 청문회는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거대 테크 기업 수장들이 나오는 청문회들은 정치쇼라는 세간의 빈축을 면치 못했다.

질문을 하는 국회의원 중 몇이나 지식으로 빌게이트랑 저커버그가 간과했을 과학 기술의 허점을 짚어낼 수 있을까? 이들이 법정에 갔던 이유는 독과점법을 어겨서다. 시장엔 없던 혁신적인 기술로 성공한 기업들이다. 당연히 혁신이던 처음엔 시장에 경쟁할 상대가 없어서 시장을 독식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나온 경쟁자들이 설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다. 자유 시장 경제는 기본적으론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른다. 구글이 새로운 검색 엔진으로 테크계를 뒤흔든 건 법정이 빌게이츠에게 벌금을 줘서가 아니라 대적할 만한 상대였기 때문이다. 나도 아무것도 없는 하얀 창에 네모 하나 있던 구글의 단순함이 좋아 크롬을 선택했지 법정이 빌게이츠를 독과점으로 법정에 세워서 벌주려고 선택하진 않았다. 최재천 교수가 동물과 인간에서 언급한 통섭의 저자 윌슨 교수의 말처럼 경제도, 사회도 자연계의 규칙대로 돌아가는 지점이다. 그런데 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시간으로 개발되는 과학에 대한 건강한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의료계 출신의원들이 많았다면 의사 증원 사태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문위원이 있다지만 왜 현실에 종사하는 이들의 의견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정책도 일관되게 진행되지 않을까? 왜 점점 정치와 국민들 간의 간격은 더 벌어지는 걸까?

의사들, 간호사들, 공학도, 과학자들은 왜 정치를 하지 않을까?

정치를 안 해도 사회적 명성을 얻고 돈을 벌 수 있으니 굳이 정치판에 뛰어들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법안을 제정하는 게 국회의원이니 법을 몰라서 일 수도 있다. 국회위원 중에 법을 모르거나 심지어 법을 어겨도 된 사람이 있으니 그건 이유가 안 된다. 기질의 영향일 수도 있다. 자연의 법칙과 기술을 연구해야 밥줄이 보장되서인지 많은 이공계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 돈과 법의 법칙으로 돌아가는 사회 현상에 대한 이해하려는 노력이 법조계나 경제계 같은 문과계열 전공자들보다 소극적이다. 인간 사회에 대한 포용력, 공감력,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을 한 발짝 떨어져서 인간 사회를 보는 분석적,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장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라의 흥망이 달린 정책을 결정하는 국회의원을 동네 사투리 좀 쓴다고 뽑는 방법으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대처할 수 있을까? 과학도 교육도 단기간에 이뤄지지 않는 분야들인데 임기 4년마다 바뀌는 정책으로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각 분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중에서 국회의원들을 뽑기 위한 좋은 방법은 없을까?



대학원 시절 대학 연구소의 벤처 바람이 불었다. 연구에 전념하던 교수님들과 달리 그 당시 신세대 교수님들은 사업과 동시에 연구를 진행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연구실에 들어가면 교수님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그래서 사업으로 바쁜 교수님이 연구는 제대로 하겠냐는 비판도 있었다.

정치 따라 언제 끊길지 모르는 연구비에 목매느니 기업하고 손 잡거나 자생해서 연구를 이어가겠다는 교수님들을 뭐라고만 할 수도 없다. 영리를 목적으로 기업에게 투자를 받는 방식에는 당장 돈이 안 되는 연구라는 아픈 손가락이 있다. 필요하지만 당장 돈은 안 되는 연구를 위해 나라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치를 하신 분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해서 세를 이루지 못하니 정책결정 시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무법과 무식이 혼재하는 정치판에 학을 떼고 오래 버티지 못한 듯하다. 그뿐인가? 학문한다는 사람이 돈과 정치를 가까이하면 속세에 물들었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니 전부 주춤할 이유들 뿐이다.



미국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히틀러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서 무기 산업을 중심으로 한 기술이 발달한 것도 있지만 히틀러를 피해 수많은 유럽의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이어서 잡히면 죽을까 봐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인슈타인인데 그냥 죽였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면 과학을 힘을 행사할 정권의 가치에 대한 불신이지 않았을까?

특히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한국에는 자금의 흐름을 따라 벤처기업을 하는 사람들, 과학자들 중에도 중국과의 협력이나 중국행을 고려하는 이들이 많다. 중국에 삼성 기술을 넘긴 연구원들도 잊을 만하면 신문에 난다. 지금 중국의 기술은 위협적이다. 나라의 지원도 전폭적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거리도 가깝다. 민주주의인 미국에 온 과학자들과 공산주의인 중국에 간 과학자들의 결과물의 미래가 같을까?

자연의 법칙이 알고 싶어서, 과학이 하고 싶어서 내린 결정이라는데 과학자의 도덕성, 정치성향에 입각해서 비난할 수 있을까?



지금 미국에선 트럼프로 연일 뉴스가 시끄럽다.

트럼프가 법정에 선 것 만으로 미국은 민주주의다. 중국의 원수가 법정에 서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사는 중국 친구는 채팅창에 중국 원수 이름은 금지어라 입력창에 칠 수도 없다.

중국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트럼프가 만약에 재판에 승소라도 하거나 대통령에라도 된다면 민주주의는 결국 다 돈이라며 날을 세우겠지만 설사 트럼프가 법망을 피해 가더라도 트럼프가 법정에 세우고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맞다. 민주주의는 선하고 최종적인 가치가 아니다. 국민들의 결정에 따라 정책을 정하고 국민의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 생태계의 원리일 뿐이다. 영원한 민주주의란 것은 없고 뒤에서 수많은 시스템을 통해 항상성이 유지되듯 끊임없는 토론과 견제를 통해야 균형을 이룬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생태계의 원리처럼 자유경쟁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선택한 나라들은 번영을 했고 생존의 원칙만 너무 강조해서 규제와 획일화된 평등으로 다양성을 희생한 공산주의는 권력의 부패로 패망했기에 현존하는 최고의 가치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주의 체제에 자유경쟁을 도입하는 돌연변이가 탄생했다. 중국은 더 이상 옛날의 공산주의가 아니다. 경제면에서는 빗장을 활짝 열고 한국이나 미국처럼 자유경제 국가를 표방한다. 그것 역시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닌 전체국가 형태를 유지한다.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당파싸움을 할 수 없도록 당도 하나고 당에서 지도자를 뽑는다. 견제할 장치가 없는 유일당에서 나온 지도자는 마음대로 임기도 바꿀 수도 있고 그에 대한 견제는 불가능해 보인다. 다양성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전체국가의 장점인 단일화로 생존에서 단기간에 유리한 추친력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온 미국 사는 친구들 중에는 미국의 토론 문화가 비효율적이라며 비판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다. 북한과 달리 세습이 아닌 당내에서 지도자를 선정하는 방식으로 나름 다양성의 명맥도 유지 중이다.



건강한 생태계를 위해 미국도 견제가 필요하다. 좋은 1위는 좋은 2위가 만든다. 아사다와 김연아처럼. 견제가 없는 독점은 건강하지 않다. 현 정세에서 미국의 견제 상대는 중국이다. 미국은 경쟁력 있는 다양성이라는 무기로 중국은 변화를 위한 추진력이라는 무기로 세계 패권 무대에서 다양성에 일조한다. 미국의 다양성에 최대의 적은 무정부주의고 이는 자칫 생존에 위협적이다. 중국의 추친력에 최대의 적은 생존에서 효율을 앞세워 통일성, 획일화로 잃어버린 다양성이다. 그래서 미국도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적절한 규제의 정도를 놓고 몸살을 앓는 것이고, 중국도 끌고 가는 성장 원동력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다양성을 향한 자유의 갈구가 심해질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이 진화의 양대 산맥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 살기도 바쁜데 미국과 중국 중 하나의 나라를 골라 충성하면 지켜줄 거라는 생각은 애초에 잊어버리는 게 좋다. 어떤 종도 자기 종의 생존 앞에 다른 종의 생존을 놓는 종은 없다. 중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세계가 중국 중심으로 돈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이 세계 중심일 때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 다 없는 것, 둘 중 하나만 남는 것, 모두 있는 것 어느 것이 한국한테 유리할까? 과학을 위해서는 어떤 가치가 유리할까?

다른 건 몰라도 과학은 틀렸다고 깔 수 있어야 한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으면 그건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과학의 결과물, 과정을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비판, 토론할 수 있는 환경에서만 과학의 중립적인 가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재밌는 나라다. 한국인들에겐 중국과 문화적 공통점이 많고 권력에 대한 순응도가 높다. 한강의 기적도 금 모으기 운동만 봐도 추진력은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생존의 법칙에 최적화된 나라다. 게다가 미국처럼 아니 미국보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깊다. 다양성에 얼마나 진심인지 미국이 양당체계를 세우기도 전에 조선에는 붕당정치가 존재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배포한 덕에 전 국민의 자긍심, 교육 수준, 시민의식도 높다. 뜻이 하나라 모아지지 않은 탓에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으면서도 외세까지 끌고 들어와서 토론을 너무 세게 해서 나라도 둘로 갈라졌다. 그 정도로 다양성에 진심이다. 역사를 통해 배운 교훈, 토론의 끝은 너 죽고 나 죽자가 아니라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는 교훈을 잊지 않는다면 어떨까? 한국은 이미 다양성과 생존 법칙 원리를 통해 항상성이란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등 터진 새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좀 더 세련되게 열쇠를 다루는 연습을 하면 사회적으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 가치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때로 논의 자체를 부도덕하게 여긴다. 그것은 절대적 가치에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큰 매력이다. 논의 자체를 할 필요도 없다는 태도는 논의할 수가 없는 무능력, 논의를 못 할 이 이유로 이용당할 수 있다. 그래서 독도를 둘러싼 논쟁처럼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전혀 쓴 신경쓸 필요도 없고 당연한 일을 굳이 노력을 들어야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진다. 남의 이야기도 듣고 남들도 다 안 다고 생각한 것, 이미 가진 것, 뼛속까지 당연한 것, 좋은 것도 말하고, 칭찬하고, 설득해야만 하는 이유다. 절대적이라 믿는 자연계의 법칙이라고 하더라도 사회에 적용해서 설명하는 역할도 해 보면 어떨까?



과학자는 정책, 정치, 정권, 사상 이런 거 생각하지 않고 사회에서 떨어져서 순수학문, 자연계의 법칙만 생각해도 될까?

과학 하는 기자도 나오고, 과학 하는 정치인, 과학 하는 가수, 과학 하는 작가, 과학 하는 아나운서도 많이 나오길 바란다.

과학의 가치중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참고자료

Consilience, Edward O. Willi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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