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AI 이야기다. 현재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이미 아이들이 AI를 이용해서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수학이던 작문이던 무차별이다.
그렇게 잘난 AI보다 내가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눈치다. 내가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라 기계는 감정을 읽지 않으니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비교할 기회가 자주 있다. 눈치는 두 나라 사이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단연코 독특한 말인 동시에 문화 중 하나이다.
관계라는 태풍의 눈이 감정이라면 눈치는 일기예보쯤이 되려나. 눈치가 빠르면 관계가 태풍이 될지 지나가는 가랑비가 될지 판단하기가 쉽다.
문제는 눈치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물어보면 그건 눈치가 아니다. 맞는지 틀린 지 그저 촉에 따를 뿐이다. 그러니 효율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대화에 밀리는 추세다. 대가를 받고 하는 일에서는 어쩌면 대화가 더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눈치 보다 배려라고 하면 어감이 훨씬 좋아진다. 왠지 눈치는 주눅이 들고 비위를 맞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다. 그래도 우리는 눈치라는 말을 쓰는 걸 보면 내가 싫은데도 참고 비위를 맞췄다는 것에 큰 가산점을 주고 싶은 모양새다.
관계를 위해 내 감정과 남의 감정을 다루려면 셋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 눈치를 보거나 배려를 하거나 대화를 통해 공감을 해야 한다. 감정이 어려운 나는 대화는 시도도 못한다. 감정을 모르면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엄마들이 아이들 혼내다가 " 왜 그러는지 말로 해봐." 그러면서 큰 소리를 치면 아이들이 숨 넘어가는 꺽꺽 소리만 내는 것이 그 이유다. 자기도 모르는데 자꾸 이야기를 하라고 하니 모르는 걸로도 또 혼나는 것 같아 억울하다. 해야 한다는 줄 아는데도 하기 싫은 마음, 친구가 좋으면서도 질투가 나는 마음, 한 대 때리니 속은 시원하면서도 슬며시 미안해지는 기분, 아까는 미안했는데 덤비니 갑자기 분통이 터지는 기분을 어떻게 다 말로하나. 눈치로 아는 거지라고 생각하면 한국인이다. 울면서도 얄미울만큼 말로 잘하는 아이들도 있다. 오히려 못하는 아이가 정이 가는건 나를 닮아서겠지. 배려도 못 한다. 눈치보다 배려라고 하면 베푸는 기분도 들고 좋으련만 간장 종지 같은 마음에 내가 봐줬다는 생색을 포기를 못하겠다. 너를 위해 포기한 내 기분도 있었다고 꼭 티를 내고 싶다. 나는 왜 이렇게 눈치만 보나 생각했는데 눈치를 전혀 안 보는 줄 친구가 하는 말이 세상에 눈치 안 보는 사람이 어디있냔다. 눈치채지 못하게 눈치를 보는 거란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지.
'친구야, 너도 어렵게 살고 있구나.'
눈치로는 헛다리를 많이 짚으면서도 AI보다 낫다는 자부심 하나로 눈치에 대한 애정이 쉽게 사그라들진 않는다.
" 시리야, 오늘 비가 오는구나. "
뭐라고 대답하려나. 막걸리 한 잔 하자고는 절대로 안 할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