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습관 03 J에게

책.습.관.

by 책o습o관

역시 미국은 꿈과 기회의 나라다. 둘째를 낳기 전 미국 고등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5년 근무했다. 한국에서 같으면 석사가 있는 내 이력서는 지나친 가방 끈으로 서류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가방 끈도 쓸데없이 긴 주제에 영어도 어눌하고 소수인종인 나를 뽑았다. 출근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왜 나를 뽑았는지 알 수 있었다. 중증 이상의 소아마비 지체장애를 가진 J의 부모는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열성이 넘치는 부모였다. 하루종일 휠체어에 앉아 있고 머리를 돌리는 것으로 하는 의사소통 외에는 신체 활동이 불가능한 J의 학습 과정을 놓고 학교 측과 보호자 책에 치열한 힘겨루기 속 새우가 나였다. 현존하는 지능 평가를 불신하고 희망에 가득 차 아이의 지적 능력을 믿는 부모와 현실적인 평가 결과를 믿는 학교 측 사이에서 수업 내용을 전달할 중개인으로 나를 뽑았다. 숫자 세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학교 측 평가와 미분을 배울 능력이 된 다고 믿는 부모 사이에 영어 탓인지 문화 탓인지 정치적일 수도 이념적일 수도 없는 이방인인 내가 별 군말 없이 J의 고등학교 수업 내용을 쉽게 변형해서 전달하기에 적합해 보였나 보다. 이래서 고등학교 수학 배워서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보조 교사에 지원하는 대부분의 고졸의 학력을 가졌거나 또는 나이가 지긋한 미국인들이 새로운 기계를 다루거나 고등학교 수업 내용을 부담스러워한 덕분에 미국 와서 10년 가까이 아이만 키우던 내가 당첨된 내 일자리는 능력자인 J 부모님이 창출해낸 것으로 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특별한 경우였다.


학습을 담당하고 있는 나 말고도 J의 신상을 돌보는 보조 교사까지 우리 셋은 팀으로 움직였다. 휠체어 때문에 종이 치기 전 움직여야 하는 J 때문에 수업이 끝나기 전 빈 복도를 활보하는 우리는 잘 나가는 조폭 못지않은 호사를 누렸다. 기껏 석사까지 공부하고 그게 감사할 일이냐고? 감사할 일이다. 석사도 뭐 별 것도 아니지만 난 J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봤다.

나는 J를 통해서 휠체어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했다. J 덕분에 보도가 얼마나 울퉁불퉁한지도 깨달았다. J를 통해 불이 나면 엘레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우리 셋은 꼼짝없이 화로구이가 되겠구나도 깨달았다. J를 통해서 웃음소리와 고갯짓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체험했고 원초적인 두 가지 기능만으로도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파급력이 있다고 믿게 됐다. J의 어깨너머로 정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를 체험했다. 지나치게 친절한 눈을 가진 어른들도 지나치게 솔직한 십 대들의 눈빛도 이전엔 내가 보지 못하는 눈들이었다. 나는 J를 통해서 교육은 지식을 배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J 덕분에 미국 고등학교의 전 과정을 체험하며 고등학교를 두 번 다닐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J 덕분에 다양한 선생님의 강의를 모두 볼 수 있었고 막연했던 내가 원한 길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J 의 중매로 나이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다른 보조 교사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J의 식사를 위해 전담 간호사까지 오면 우리는 완전체가 되어 웃고 떠들었다. 꺽꺽 대며 웃는 J는 영락없는 사춘기 개구쟁이이다. 록음악을 좋아하는 J는 학교 행사로 하는 록 그룹 공연에 가면 들어가는 순간부터 환호성을 지르며 즐길 준비를 한다. 전자기타의 지징지징 소리에 이어 드럼이 터지면 J는 마치 자리에서 뛰어오르 듯 온 몸을 뻣대어 휄체어를 박살냈다. 공연 후 J는 땀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밤새 근육 경련을 앓았다는 학부모의 원성에 학교 음악 행사를 절제해야한다고 설명했지만 포기를 모르는 J는 괴성과 반항적인 눈빛으로 우리의 비행을 주도했다. 결국 우리 패거리들은 영락없는 문제아들 마냥 복도를 서성이며 음악을 즐겼다. J는 알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온 문제아라는 것을. 나의 꿈 같았던 두 번째 고등학교 시절이 가고 J는 졸업을 했다.

J 부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네 커뮤니티 컬리지에서 함께 공부할 사람을 찾는 듯했다. 다른 꿈이 생긴 나는 지원하지 못했다. J는 지금 학교 근처 헬스장에서 고객을 맞이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인사담당자가 누군지 적성을 제대로 살려 고용했다. J의 급작스럽고 기합에 가까운 힘찬 웃음소리를 들으면 아마 아령이 절로 들릴 것이다.


형평성 따위, 원리 원칙 따위를 뛰어넘은 부모님 덕에 J는 선진국인 미국의 교육 환경을 고려해서도 특별히 운이 좋은 경우다. 나는 운이 더 좋았다.

영어 선생님이 숙제로 내 준 유대인 학살을 다룬 Night의 오디오북을 수십 번 반복할 때면 J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곤 했다. J에게는 다른 십 대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책장을 덮어버릴 자유로운 몸이 없었다. J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떠오르면 언젠가 꼭 영어로 된 책을 낼 생각이다. 진짜 개그를 아는 그 녀석을 웃길 수 있다면 베스트셀러 부럽지 않을 것 같다.

Merry Christmas, My Special friend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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