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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May 25. 2024

11화 애플트리베이 바닷가

뉴질랜드 밀레니엄 여행기


첫 직장을 그만둔 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 남매 두 명에게 학습지 풀이를 도와주는 알바를 했다. 그 집에는 나 외에도 영어, 산수, 수영, 피아노 등등 선생님이 여러 명 들락거렸다. 가정부 한 명이 홀로 집을 지키는 커다란 단독주택에서 과외교사들은 서로 마주치는 일 없이 교대로 수업을 했다. 


일주일에 2회, 두 시간 동안 학습지 풀이를 도와주는 일. 언뜻 팔자 좋은 꿀알바로 생각될지 모르겠다. 비록 ‘세상의 거의 모든’이라고까지 말할 순 없지만, 나는 정규직, 비정규직, 사무직, 판매직, 육체노동직 가릴 것 없이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했다. 그중 영혼까지 탈탈 털리면서 정말이지 이건 죽어도 못 하겠다 싶은 직업이 딱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학습지 알바였다.


초등학교 4학년 그리고 2학년 두 남매는 역삼동 정원 달린 주택에서 선생들을 갈아치우며 보낸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남매의 부모는 사업 때문에 하루 종일 집을 비웠고 부모의 간섭이 느슨한 부잣집 아이들이 그렇듯 남매는 제멋대로였다. 당연히 과외교사에 대한 예의나 존경심 같은 건 약에 쓸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남매 중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여자아이는 성격이 몹시 난폭해서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매번 폭주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심지어 개에게 물린 적도 있었다. 그 동네에는 안쪽은 낮지만, 바깥에서 볼 때 높은 담을 가진 집이 많았다. 포악한 2학년을 물어버린 셰퍼드를 키우던 집도 그런 구조였다. 2학년은 담 안쪽에 있는 셰퍼드를 노리고 바깥에서 계속 돌을 집어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고 결국 참다못한 셰퍼드가 담에서 뛰어내려 2학년을 물었다. 2학년은 그렇게 높은 담을 설마 뛰어내릴 줄은 몰랐다며 펑펑 울었다.(오죽했으면 개가 뛰어내렸을까?)


포악한 2학년과 오빠인 4학년은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서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할 때면 서로의 눈을 뽑으려고 덤벼들면서 울부짖었다. 할 수 없이 둘을 격리하고 한 명씩 학습지 풀이를 도와주면 나머지 한 명이 잠긴 문고리에 매달려 괴성을 지르거나 외벽을 타고 2층까지 기어 올라와 유리창이 깨져라 창문을 흔들어댔다. 매번 수업을 마치고 그 집 대문을 나설 때마다 나는 담벼락이 즐비한 부유한 동네 구석진 골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과연 이 알바를 계속할지 말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 했다.  


살다 보면 이따금 망연자실해지는 순간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라하우를 출발한 지 채 20분이 지나기도 전, 나는 좁은 등산로 한쪽에 배낭을 집어 던지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다. 긴 머리카락은 진작 산발이 됐고 곱게 한 화장이 섬뜩하게 뭉개졌다. 


드라이한 긴 머리카락과 메이크업,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대단했다. 시절은 밀레니엄. 집 앞 구멍가게에 과자 한 봉지 사러 나갈 때도 풀메이크업을 하고 힐을 신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땐 다 그랬다. 그 시절 여자 아이돌은 모두 킬힐을 신고 무대에 올랐다. 


뉴질랜드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사진 정리를 하다가 여행의 어떤 구간이 완벽하게 공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도 사진도 남아있지 않았다. 트램핑 첫날, 나는 산장으로 향하는 숲길 어딘가에서 정신과 영혼을 모두 잃어버렸던 게 확실하다. 


지난 연재에서 배낭 무게가 10kg이었다고 썼는데 다시 책을 찾아보니 12kg다. (겨우 12kg밖에 되지 않았구나. 체감상으로는 분명 60kg였는데.) 그때는 글을 쓴 적도, 쓰려고 생각한 적도 없어서 공항에서 숫자로 확인해 준 배낭 무게 따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들었다. 진실을 알 순 없지만, 12kg이 아니라 아마 22kg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의 지옥 같았던 심정을 설명할 수 없다. 


한쪽이 기울어진 대형 배낭을 메고 끝없이 걸어가는 일은 시련에 가까웠다. 십 분 걷고 이십 분 쉬고 다시 십 분 기어갔다가 이십 분 주저앉아야 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납덩어리 같은 짐 때문에 해변의 아름다운 경치는커녕 고개조차 가누기 어려웠다. 마치 공룡의 발바닥에 깔려 버둥거리는 기분이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흥건하게 땀이 흘렀다. 


아벨타즈먼 트랙은 마라하우에서 시작해 북쪽 토타라누이에서 끝난다. 가파르지 않고 대개 날씨도 좋기 때문에 안전하다.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안내하고 있어서 길을 잃는 여행자도 없다. 트램핑은 총 3박 4일로 마라하우와 토타라누이 사이에 위치한 세 개의 산장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각각 앵커리지 산장, 바크베이 산장, 아와로아 산장이었다. 성인의 평균 걸음 속도로 하루에 대략 서너 시간 소요된다. 등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2박 3일 일정으로 빠르게 압축시킬 수 있다. 썰물 시간에 맞춰 바다를 가로질러 가면 더욱 짧아진다. 앵커리지 산장으로 가는 첫날, 나는 일곱 시간 걸려서 그곳에 도착했다. 


마라하우와 앵커리지 산장 사이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해변이 있었다. 트랙을 걷던 나는 갈림길에서 산장을 뒤로하고 애플트리베이 바닷가로 향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백사장 한가운데 파도에 쓸려온 널찍한 고목 위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샌드위치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비워져 한참 넋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마티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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