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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May 11. 2024

넬슨 파라디소 백패커스

뉴질랜드 밀레니엄 여행기 10화

오클랜드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다시 넬슨으로 이동하면서 농촌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원래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우리나라에 비해 워낙 한가한 편이지만,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인구밀도가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넬슨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공항시설까지 갖춘 소도시 넬슨은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다. 더욱 무거워진 배낭 때문에 택시를 탈 생각이었지만, 놀랍게도 도시에 택시가 없었다.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다운타운은 몇 블록이 전부였고 바로 주택가로 이어졌다. 그 너머 깊은 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공기가 어찌나 신선했는지 아무튼 여긴 절대 도시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바위 같은 배낭을 메고 백패커스를 직접 찾아 나서야 했다. 


넬슨의 파라디소 백패커스는 여름을 즐기러 온 별장 같았다. 젊은 투숙객들이 풀장 옆 선베드에서 일광욕하거나 발리코트가 있는 모래밭에서 공놀이에 열중하거나 포켓볼을 즐겼다. 넓은 마당이 숙객들로 북적이는 걸 보면 결국 넬슨 시내에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모양이었다. 


배정받은 4인용 방은 2층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화장실과 욕실이 딸린 방이라 조금 안도했지만, 전체적인 숙소 사정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방을 같이 사용하는 줄리와 스탭(스테파니의 애칭일까?)은 스무 살 쌍둥이 자매로 캐나다에서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다. 발랄한 캐나다 사람답게 줄리와 스탭은 먼저 환한 웃음을 보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여행을 떠난 이후 여행자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미국인과 캐나다인은 세계 어디에서나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그에 비해 뉴질랜드인과 유럽인은 무뚝뚝하다. 하지만 어디 한국인에 비할까. 나는 누구에게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고 이름을 묻지 않았다. 평소에도 넉살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과묵한 여행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날이 저물자, 백패커스 전체가 클럽처럼 변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즉석에서 어울려 고기를 굽고 맥주를 마셨다. 요란한 록 음악까지 들려오면서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바비큐 파티가 열리는 마당 여기저기에서 마음 맞는 사람끼리 앉아 웃고 떠들었다. 젊은이들의 친화력은 언제 봐도 감탄스럽다. 


동양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마당을 가득 채운 서양인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누구라도 좋으니 비슷한 정서를 가진 동향 사람과 대화하고 싶은 막연한 바람이 생겼다. 하지만 굳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 아니면 모처럼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왔으니, 미친 척 저들과 어울려 맥주병을 기울이며 허접한 영어를 늘어놓는 건 어떨까? 역시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좋겠다. 


“너무 시끄럽지? 괜찮아?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할까?”


줄리인지 스탭인지 아무튼 쌍둥이 중 하나가 맥주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내 귀를 가리켰다.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걸 보곤 줄리(혹은 스탭)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도 내가 좀 웃겼다. 다시 잠을 청했다. 내일 새벽 일찍 아벨타즈먼 국립공원으로 떠나야 했다. 



다음날 새벽 날씨가 쌀쌀했다. 가랑비까지 부슬부슬 내렸다. 일찌감치 체크아웃하고 백패커스를 나섰다. 너무 서둘러 나온 탓에 인터시티 정류장 근처 빵 가게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챙겨 먹은 다음에도 한참 기다려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작은 버스에 올랐다. 트랙이 시작되는 마라하우까지 세 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 안에는 커다란 대형 배낭을 멘 십여 명의 서양인이 앉아 있었다. 마라하우에 도착하자 그들은 각자 배낭을 챙겨 버스에서 내렸다. 마라하우 입구에 조감도처럼 보이는 공원 안내판이 있었는데 배낭의 무리는 안내판 앞에서 지도를 펴고 코스를 점검한 뒤 곧 삼삼오오 트랙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룹별로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출발했다. 


모두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출발하지 않았다. 문득 심정이 복잡했다. 나흘 동안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일단 트랙에 들어서면 편의점도 없고 식당도 샤워도 전기도 심지어 조명도 없는 야생이었다. 착실하게 밥을 지어 먹을 생각은 진작 포기했다. 대신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과 열량이 높은 초콜릿을 크라이스트처치 대형 슈퍼마켓에서 구입했다. 


침낭, 자외선 차단제, 등산화, 모자, 두꺼운 양말 등등 트램핑을 위해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했다. 그래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자연을 걸어가는 여행이 이토록 우울한 일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녹음이 우거진 트랙 입구가 심하게 적막했고 문명의 단절은 예상보다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날씨는 좋을까? 중간에 비가 막 퍼붓는데 샤워를 못 한다면 어떤 기분이 될까? 산길을 혼자 걷다 배탈이라도 나서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에잇, 나도 모르겠다!!


 나흘 치 식량이 추가되어 허리가 휘어지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아벨태즈먼 국립공원 안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앞으로 산장에서 잠을 자며 지내야 하는 나흘, 샤워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고, 꼬질꼬질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 나흘이었다. 하지만 한발을 떼고 나니 생각보다 괜찮다는 굳은 마음이 생겼다. 트랙 끝에 분명 이 모든 불편을 감내해도 괜찮을 만큼의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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