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앵커리지 산장

뉴질랜드 밀레니엄 여행기

by 소다캣

네덜란드에서 온 마티네는 푸른 눈에 금발을 가진 50대 중년 여성이었다. 몸집이 크고 활달한 그녀와 마라하우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기억이 났다. 마티네는 기운이 빠져서 눈동자가 흐릿해진 나에게 기운을 내라며 약간 눅눅하고 엄청 단 과자를 자꾸 권했다. 어른이 주시는 건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썩 맛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다 보니 어느새 한 봉지를 다 먹고 있었다. 마티네는 내게 혼자냐고 물었다. 그녀도 동행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마티네의 대답은 의외였다. 혼자 여행 떠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옆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마티네의 옆모습은 그녀에게 별로 즐겁지 않은 사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이따금 마티네의 사정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만약 용기를 내서 왜 혼자 떠나왔냐고 물어보았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린 건 마티네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정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나이도 인종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길을 걷는 게 버겁고 사교적이지도 않은 데다가 영어도 잘 못한다. 이런 내 사정 외에 다른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젊은이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따금 만나는 어른처럼 속 깊은 젊은 사람이 귀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땀을 닦는 것조차 귀찮은 오후였다. 마티네는 푸른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면서 바다로 들어가 수영했다. 수영복을 챙겨오지 않아 약간 후회가 되었다. 푸른 바다 위에서 등을 대고 누워 수영하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 배낭을 멨다. 그후 산장에서 몇 번 마티네와 마주쳤지만 그녀의 사정은 영영 알 수 없었다.


애플트리 베이에서 앵커리지 산장까지는 마라하우에서 애플트리 베이까지보다 훨씬 멀었다. 트래킹을 시작한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영혼까지 지쳐버린 나는 무슨 수로 산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계속 걸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미치도록 무거운 배낭 따위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계속하다 보면 괜찮아진다.’


이것은 주로 무언가를 가르치는 강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어떤 상황에 대입해도 참으로 적절한 오래된 진리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경악스러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놀라운 존재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 코가 깨져도, 실연을 당해 폐인이 되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린 괜찮아진다. 절대 적응할 수 없을 것 같아도 그때를 넘기면 더 이상 어렵지 않다. 문외한도 결국 숙련자가 된다. 여행을 통틀어 이건 아니야, 눈물 나도록 후회되었던 순간은 트랙의 입구에서 첫발을 뗐을 때와 첫날의 강행군뿐이었다.


백만장자에 대한 책을 저술한 마크피셔는 “실패한 사람은 현명하게 포기하고 성공한 사람은 미련하게 참는다.”라고 했다. 어떻게든 앵커리지 산장과 조금이라고 가까워지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나는 이런 고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얻어야 할 대단한 무엇인가, 자꾸 생각했다. 그런 건 세상에 없었다.


그럼에도 쉬었다 다시 일어났다가 다시 쉬었다가 또 일어나기를 무한 반복하면서 앵커리지 산장에 도착하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강한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략 여섯 시간이 넘게 걸려 저 멀리 바닷가에 세워진 앵커리지 산장이 눈에 들어올 즈음, 나는 왜 민요가 생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괴상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현실을 외면해야 할 만큼 농사일이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실성한 것 같은 콧노래와 스스로 영차영차 북돋으면서 드디어 도착한 앵거리지 산장 바로 앞에 시원한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애플트리베이에서 한참 늦게 출발한 마티네 아줌마도 진작 그곳에 도착해 선탠을 즐기고 있었다. 산장에 묵는 사람들은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보트를 타거나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는 중이었다.

배낭을 땅에 내려놓자 아아, 세상이 이토록 가벼울 수가 없었다. 반팔 티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산장 마당에 긴 빨랫줄이 있었는데 이미 도착한 사람들의 빨래들이 산장 티켓처럼 줄줄이 걸려있었다.


뉴질랜드는 한두 시간이면 빨랫감이 바짝 마를 정도로 태양이 쨍쨍하게 내리쬔다. 빨래를 부르는 그 햇볕 아래에 당장 땀으로 젖은 옷을 걸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배낭을 질질 끌고 산장으로 들어간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미안합니다. 병역 기피 혐의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거나 더는 활동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연예인 분들과 병역을 미꾸라지처럼 피해 간 대한민국 권력층 자제분들. 그동안 그들을 비겁한 범죄자로 여겼던 나 자신을 반성합니다.


일명 벙커라고 불리는 산장의 숙소를 보면서 그들이 왜 거짓말까지 하면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는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불편한 백패커스를 전전하며 열악한 숙소 사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산장의 숙박시설은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6~8명이 나란히 누워 자야 하는, TV에서 봤던 군대 내무반을 연상하게 하는 그 벙커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는 얇은 매트리스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keyword
월, 화, 수, 목, 금 연재
이전 11화애플트리베이 바닷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