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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Jun 01. 2024

12화 앵커리지 산장

뉴질랜드 밀레니엄 여행기

마티네는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몸집이 크고 활달한 네덜란드 여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라하우까지 같은 버스를 타고 온 기억이 났다. 마티네는 기운이 빠져서 눈동자가 흐릿해진 나에게 기운을 내라면서 약간 눅눅하고 무척 단 과자를 자꾸 권했다. 어른이 주시는 건데 안 받을 수도 없고, 썩 맛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입으로 집어넣다가 어느새 한 봉지를 다 비웠다. 


마티네는 내게 혼자 왔냐고 물었다. 그녀도 동행자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곤 혼자 떠나는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되물었다. 마티네의 대답은 의외였다. 혼자 여행 떠난 것은 이번이 생애 처음이라고 했다.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옆얼굴이 그녀에게 별로 즐겁지 않은 사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아벨태즈먼 여행이 끝나 서울로 돌아간 후 나는 가끔 마티네가 무엇 때문에 뉴질랜드로 혼자 여행을 떠나왔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왜 그녀의 사정을 묻지 않았을까? 입을 다물고 그만 시선을 돌린 것은 마티네를 배려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지쳤고 귀찮았고 영어로 대화하기가 어쩐지 두렵고 민망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사정을 내가 알아서 뭐하겠나, 싶었다. 그때의 나는 젊었지만 지금보다 뭐랄까, 좋게 말하면 합리적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공감력이 떨어졌다. 그리고 또래보다 훨씬 순수했는데 내가 말하는 ‘순수’는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처럼 ‘낭만적인 무지’다.


젊었던 내가 그토록 무지했던 이유는 아마 공감력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MBTI에 의하면 공감력이 분석력과 대치되는 감성이라고 하는데, 공감력의 정의가 나와는 다른 것 같다. 내가 경험했던 삶에 비추어보면 공감력은 지성이었다. 단순 암기가 아닌, 조금 더 복잡했던 학습. 


땀을 닦는 것조차 귀찮은 오후였다. 마티네는 푸른 바다가 너무 아름답다며 바닷속으로 들어가 수영하겠다고 했다. 마티네의 사정은 영영 알 수 없었고 수영복을 챙겨오지 않은 나는 약간 후회했다. 푸른 바다에서 수영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다시 배낭을 멨다.


앵커리지 산장까지는 마라하우에서 애플트리베이보다 훨씬 멀었다. 어떻게 앵커리지 산장까지 걸어왔는지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것만 말하겠다. 노래를 부른 건 정말이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냥 노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실 노래가 아니라 주술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민요가 생겨났는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괴상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현실을 외면해야 할 만큼 농사일이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결국 산장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저 멀리 바닷가에 세워진 산장이 눈에 들어올 즈음, 엄청난 고생 끝에 찾아온 앵거리지 산장 바로 앞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애플트리베이에서 나보다 한참은 늦게 출발한 마티네는 벌써 모래 위에 타올을 펴고 선탠하고 있었다. 진작 이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해변에서 수영하거나 보트를 타거나 저녁 식사 준비를 하면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다. 


배낭을 땅에 내려놓자, 아아! 세상이 이토록 가벼울 수가 없었다.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산장 잔디마당에 설치된 빨랫줄에는 이미 도착한 여행자들의 빨랫감들이 산장 티켓처럼 줄줄이 걸려있었다. 뉴질랜드는 빨래가 한 두 시간이면 바짝 마를 정도로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쬔다. 빨래를 부르는 햇볕 아래로 땀으로 젖은 옷을 걸어놓고 싶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배낭을 질질 끌고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일명 벙커라고 불리는 산장 침실을 왜 우리나라 젊은 남자들이 군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불편한 백패커스를 전전하며 열악한 숙소 사정에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시설이었다. 예닐곱 명이 나란히 누워 자야 하는, 마치 TV에서 봤던 군대 내무반과 똑같은 벙커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얇은 매트리스가 줄줄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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