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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베이 산장 1

by 소다캣

아벨태즈먼 코스트 트랙의 특징은 바로 밀물 썰물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벨태즈먼 트랙은 몇 군데 지름길이 있는데 그곳으로 지나가려면 썰물 때를 기다려야 한다. 밀물 썰물시간은 매일 매일 달라진다. 운이 없으면 새벽 5시에 일어나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래서 타이드 시간대가 좋은 날짜를 골라 트램핑을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다.


[타이드 시간]

첫째 날 : 바다를 건너는 구간 없음

둘째 날 : am 7시 22분

셋째 날 : am 8시 03분,

마지막 날 : am 8시 49분.


둘째 날은 앵커리지 산장에서 적어도 7시 22분 전에는 떠날 준비를 끝내야 하는 이른 일정이었다.

시간 맞춰 앵커리지 산장을 출발해 두 번째 산장 바크베이에 도착한 건 정오가 조금 넘어서였다. 외관상 앵커리지 산장과 전혀 구분되지 않는 바크베이 내무반 매트리스 한쪽에 자리를 잡고 배낭 정리를 하면서 벌써 2일 차로 접어든 그간의 여행을 돌아보자니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엄청난 무게의 배낭 때문에 죽을 것 같은 행군은 이미 팔자려니, 체념해 더 이상 마음의 괴로움은 없었다. 앵커리지에서의 하룻밤 이후,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산장까지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신세가 편치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산장 내부는 전기도 없고 대낮에도 어두침침해서 발랄한 기분이 되기 힘들었다. 다음은 앵커리지 산장에서 일과를 정리한 것이다.


[앵커리지 산장 도착 직후]

수영복 차림의 서양 젊은이들이 파도의 느낌이 너무 좋다며 바다로 뛰어들라고 내게 손짓을 했지만 묵묵히 옷을 정리하고 매트리스의 먼지를 털어냈다.


[늦은 오후]

산장 앞 해변에서 수영과 카약을 즐기는 서양인들을 바라보다가, 땀에 젖은 티셔츠와 수건을 세탁해 빨랫줄에 걸쳐놓고 혹시 탈골한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어깨를 살펴보았다(이 뉴질랜드 여행 이후 비만 오면 어깨가 쑤신다).


[해가 진 후]

깊은 산중이라 해가 지면 사방은 칠흑처럼 깜깜해지기 때문에 촛불을 사용해 가면서까지 해야 할 대단한 일과가 없으면 이내 침낭으로 들어가 잠을 청한다.


[한밤중]

억수같이 내리붓는 빗소리에 문득 잠에서 깼다. 바람까지 불어닥치는 소리까지 들려오자 깜빡 잊고 걷지 못한 빨래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밖이 무서워서 나가보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주부 생활이었다!


뉴질랜드의 여름 날씨는 무척 낯설다. 한국처럼 습도가 높지 않은 여름이다. 신기하게도 움직이면 땀이 나고 가만히 있으면 추워진다. 햇볕 아래 있으면 건어물처럼 바싹 구워지고 그늘에 있으면 냉장고에 들어간 느낌이다. 한낮에는 수영복을 입을 정도로 덥지만 아침이 되면 손이 시려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추워진다. 할 수 없이 성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고구마 판매업계 의상을 뒤집어써야 한다.


이제 ‘샌드플라이’라고 불리는 뉴질랜드 모기에 관해 설명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샌드플라이에 대해 말하자면 이놈들은 사람의 인성까지 변화시키는 모기다. 원래 시골 모기가 도시 모기에 비해 덩치도 크고 물렸을 때 훨씬 아픈 법이지만 샌드플라이는 모든 시골 모기 중에서도 지존급이었다. 이놈들은 사람이 뻔히 바라보고 있는데 맨살에 날라와서 문다. 예의상 팔다리를 흔들어주었지만 미동하지 않는다. 깜짝 놀라 미친 듯이 흔들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꼭 피를 봐야 멈춘다. 심지어 신발까지 뚫는다. 바르는 모기약을 7~8겹을 발라도 소용없었다. 샌드플라이에게 물리는 것은 트램핑을 떠나는 자들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참고로 샌드플라이에게 한번 물리면 그 자국은 3개월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바크베이로 가는 길은 내무반의 황량함과 주부 생활의 고단함과 샌드플라이에 대한 공포로 얼룩져있었다. 10년은 늙은 얼굴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이것이 고난의 끝은 아니었다.


앵커리지와 바크베이의 중간에는 짧지만 바다를 건너는 타이드 구간이 나타난다. 썰물시간이라고 해도 군데군데 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발목이 잠기는데 때로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바다를 헤치면서 건너야 할 때도 있다. 그런 길이 나오면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고 첨벙첨벙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신발 벗기가 무척 망설여졌던 나는 혹시 그냥 건너갈 방법이 없을까 끈질기게 도랑을 따라갔다. 안타깝게도 한걸음에 뛰어 넘을 수 있는 만만한 물길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 이렇게 엉뚱한 곳으로 걸어가면 단축된 코스로 가겠다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한참을 걷다가 1미터 정도로 폭이 줄어든 물길 앞에 서서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폭이면 신발을 벗지 않고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도움닫기로 힘껏 뛰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몸을 움직이면 신발이 젖지 않고도 물길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펄쩍 뛰었다.


“아아아아아아악!”


공룡 같은 배낭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 발목이 아니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뻑 젖어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겨우 바닷물을 건넜다. 이제 배낭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살인 병기였다. 타이드 구간 건너편에 설치된 투박한 나무벤치에 애증 관계인 배낭을 내려놓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았다. 몸보다는 내 마음이 더 크게 상처 입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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