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꿨던 트램핑의 로망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보았던 웅장한 자연 풍광을 배경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트램핑 사흘째, 나는 정말 호빗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지난 48시간 동안 머리도 감지 못했고 샤워도 하지 못한 채 쿰쿰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지저분함을 넘어 궁색한 지경에 이르자 더 이상 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산장에는 샤워 시설이 있었다. 바로 이렇게 생긴.
정말이지 샤워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샤워장이었다. 그나마 이 샤워시설은 그럭저럭 구색을 갖춘 편에 속한다. 다른 산장은 부스도 없이 수도꼭지 하나만 있었다. 해변에서 수영한 뒤 바닷물을 대충 씻어내는 용도인 것 같았다.
나는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수영복을 챙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씻긴 해야 할 텐데 한적한 시간에 옷을 모두 벗고 과감하게 샤워해 버릴까? 그러다가 변태 같은 아저씨가 지나가면 어떻게 될까?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한국어 비명을 듣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 산장의 모든 사람이 샤워장으로 뛰어나오는 전개…….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내내 궁리하다가 결국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새벽에 샤워할까? 오전 3시 정도에 도둑처럼 샤워하면 아무도 모를 거 아냐.’
그래서 새벽에 일어났다. 과연 이렇게까지 샤워해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절박한 사안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뉴질랜드의 여름밤은 여름밤이 아니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맞먹을 정도로 춥다.
해가 뜨기 한참 전, 고구마 장수를 위한 점퍼를 뒤집어쓰고 더듬거리면서 어두컴컴한 숲으로 향했다. 정말 추웠다. 두꺼운 기모 점퍼를 입었는데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내가 샤워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 새벽뿐이었다.(수영복 꼭 챙기라고!)
물줄기가 떨어지는 샤워기 앞에서 팔짱을 끼고 종종걸음으로 한숨을 쉬다가, 뛰어들려고 하다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가 어느 한순간, 인당수에 뛰어드는 심청이의 심정으로 돌진했다.
아, 이건 차가운 정도가 아니었다!
물줄기 모양의 막대기가 머리에 내리꽂는 것 같았다. 차가운 감각을 넘어서 아플 지경이었다. 턱이 어찌나 떨리는지 이가 부스러지는 줄 알았다. 되도록 신속하게 끝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끝끝내 머리를 감고 마하의 속도로 온몸을 문질러 댔다. 겨우겨우 샤워를 끝낸 다음 수건으로 겹겹이 감은 것도 모자라 모든 옷가지를 꺼내 입고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너 혹시 샤워했니?”
날이 밝자 여전히 젖어있는 내 머리카락을 보면서 사람들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기겁했다.
“너 미쳤어!”
나는 아벨태즈먼 트랙을 걷는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그것도 여자 혼자, 엄청나게 큰 배낭을 메고 안간힘을 쓰며 걸어가는(아니 기어가는) 모습에 다들 아무 소리 안 했지만 과연 제대로 산장을 찾아올 수 있을까, 상당히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해도 끝까지 산장으로 걸어오고, 혼자서도 잘 놀고, 결정적으로 사무치게 추운 새벽에 찬물 샤워까지 하자 다들 적지 않게 놀란 것 같았다. 가족들과 함께 산장을 찾은 뉴질랜드 아줌마들은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은 표정으로 일제히 나를 주목했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괜히 쑥스러워져서 허둥지둥 짐을 챙겼다. 그러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아와로아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