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와로아 산장은 하얀 모래사장 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바다와 가깝게 붙어있는데도 바닷바람이 불지 않았고 특유의 짠 내도 없었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사방이 고요한 장소였다.
호수처럼 잔잔한 아와로아의 바다는 파도가 일지 않았다. 그런데도 깊고 푸른 바다빛을 띠고 있었다. 물이 신기할 정도로 투명해서 차가운 바닷물로 들어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벨태즈먼의 마지막 산장에서 짐을 푼 나는 야생 오리가 활보하는 마당을 지나 바닷가로 향했다. 그때까지 산장에서의 시간은 조금 지루하게 흐르기 마련이었지만 아와로아에서는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진 포치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다를 구경했다. 백사장 끝으로 시선을 돌리면 산장을 향해 걸어오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작은 점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몰골은 거의 비슷했는데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고 모두 더러운 티셔츠 차림이었다.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중에는 앵커리지와 바크베이 산장부터 나와 자주 마주쳤던 팀도 있었다.
[키위 커플]
5~60대 정도, 노년에 접어들기 시작한 뉴질랜드인 부부다. 레이번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근엄해 보이는 남편과 혈색이 좋고 항상 웃음이 가득한 시골 아주머니 같은 부인이 늘 함께 다녔다. 체격이 왜소한 아저씨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에 표정이 별로 없다. 미국 배우 론 리프킨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늘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반면 발랄한 부인은 체구도 훨씬 크고 살집도 있고 목소리도 높아서 남편과 대조적이다. 트랙에서 활기차게 앞장서 걸어가는 아주머니와 그 뒤를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따라가는 아저씨를 종종 목격했다.
[빅토리아 커플]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을 떠올리게 하는 4~50대 중년 커플이다. 호리호리하게 키가 큰 여자는 짧은 빨강 머리칼에 높은 코와 흰 피부, 주근깨를 가졌다. 케이트 블랑세만큼 미인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가운 표정에 말이 없었다. 반대로 남자는 말이 많은 아프리카 대장쯤으로 보였다.
[남자가 몹쓸 커플]
마라하우에서부터 만났던 팀이라 낯이 익었다. 아마도 20대 초반인 것 같은데 정확한 관계를 모르겠다. 남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비호감이었다. 안경을 쓴 여자는 작은 키에 통통한 몸집, 순박한 인상을 가진 모범생 타입이었다. 비호감 남자가 여자를 너무 냉랭하게 대해서 커플이 아니라 여행에서 만나 어울리는 중이거나 그냥 우연찮게 같이 공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의 표정이 마치 친구들과 내기하다 지는 바람에 반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여자와 억지로 커플이 된 것 같다고 할까. 정말 커플이라면 남자가 몹쓸 커플이다.
비호감 남자는 자신이 기분 좋을 때는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다가, 내가 먼저 웃으면서 인사하면 모른 척하는 둥, 도무지 기분을 종잡을 수 없었다. 여자와 몇 번 인사를 나누는 것 말고는 되도록 멀리했던 팀이었다.
[투명 인간 커플]
이 팀이 첫날부터 있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들의 모습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서양인들의 외모는 구분하기가 너무 어렵다. 20대 커플이었고 나중에 ‘남자가 몹쓸 커플’과 함께 어울려 다녔다.
[나 홀로 청년]
혼자 트램핑 여행을 떠난 쾌활한 오클랜드 청년이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정도로 보인다. 곧 투명 인간 커플, 남자가 몹쓸 커플과 어울렸다. 하지만 어정쩡한 나이 때문인지 홀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 보였다.
산장에는 2~30명의 여행자가 묵었는데 몇 팀을 제외하곤 매일 바뀌었다. 대부분 뉴질랜드 키위와 이십 대 초반의 유럽 배낭여행자들이었다.
아와로와 산장에서도 한 무리의 젊은 유럽인이 포치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낯선 억양으로 비교적 쉬운 영어를 사용하는 걸 보면 국적이 제각각인 것 같았다. 손에 저녁밥이 담긴 접시를 들고 내 쪽을 슬쩍 보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늘 그렇듯 혼자 있는 저 동양 여자의 국적은 무엇일까? 일본? 중국? 한국?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제는 음식이라 부르기 싫어진 샌드위치와 물을 입안으로 쑤셔 넣은 후 나는 산장 마당에 앉아서 해가 지는 저녁 하늘을 구경했다. 그때 키위 커플의 혈색 좋은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넌 언제나 혼자로구나. 뭘 하고 있니?”
나는 작은 노트를 가리켰다.
“그래, 넌 항상 뭔가를 적고 있더라, 그게 뭐야?”
빅토리아 커플의 케이트 블랑세 아주머니도 가세했다. 트램핑 3일 차가 지나자 그들은 바크베이 산장에서의 콜드 샤워를 감행한 동양 여자에게 말을 붙일 만큼 인류애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그 사건 이후 나는 말 없는 동양 여자에서 엉뚱한 괴짜로 비친 것 같았다). 다들 젊은 여자가 혼자 여행을 떠나왔다는 사실에 기특해하고 있었다. 산장의 아주머니들은 트램핑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왔고 또 인터넷으로 아벨태즈먼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말에 놀란 눈치였다.
“오, 정말이니? 너 참 대단하다.”
키위 커플의 근엄한 아저씨는 오클랜드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클래스의 7,80%가 한국인이지만 트램핑하면서 만난 한국인은 내가 처음이라면서 몹시 신기해했다. 아저씨 말씀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힘든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절대로 트램핑을 하지 않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묵묵히 걷는 것을 질색하는 한국 젊은이들 덕분에 나는 그 즉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꽤 훌륭한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
“넌 정말 용감한 한국인이다.”
“맞아, 맞아, 혼자서 여기까지 오다니 굉장히 씩씩한 걸!”
세계 어디서나 아줌마들은 비슷하게 친절하다. 갑자기 혼자 여행을 떠나온 용감한 한국인으로 추대된 나는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오클랜드에서 온 영어선생님, 키위 부부는 괜찮다면 마지막 날 함께 걷자고 했다. 그들의 이름은 메리와 피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