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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로아 산장 3

by 소다캣


어둠이 깊었지만 트램핑 마지막 밤이라서인지 다들 늦게까지 깨어있었다. 어르신들과 한결 가까워졌지만 산장의 영제네레이션들과는 여전히 소 닭 보듯 했다. 어르신들이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짐 정리를 하면서 아와로와의 밤을 보내는 반면 젊은 여행자들은 식탁에 모여 밤새도록 영화 <반지의 제왕>에 대한 광란의 토론을 벌였다. 톨킨이 누구냐는 둥, 프로도가 어떤 캐릭터라는 둥, 여행의 끝에서 부쩍 화목해진 젊은 그들과 떨어져 나는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갑자기 잠에서 깼다.


산장의 내무반은 잠자리가 무척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못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워낙 하루의 일과가 고되기 때문에 매번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일단 내무반 침대 가장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침낭으로 들어가면 내 옆에 누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개의치도 않았다. 오히려 그분께 죄송하다. 나는 심하게 코를 곤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잠버릇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그날 밤 내 옆에서 누군가 경악스러운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잠버릇이 나쁜 사람은 처음이었다. 밤새도록 부스럭 뒤척거리는 와중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울부짖음까지. 와, 정말이지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 의상을 강제로 입히고 싶었다. 결국 침낭을 싸안고 밖으로 뛰쳐나와 차가운 산장 부엌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다.


“대체 누가 그렇게 코를 골디? 호호호호.”

“묻지 마세요.”


다음 날 아침 메리 아줌마가 웃겨서 죽는다.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는 다른 방에서 주무셨다. 그날 밤의 참상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다). 내가 부엌 바닥에서 누에고치처럼 뒹굴며 잤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산장이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이제 메리 아줌마는 나를 완전히 외계인 취급했다. 그건 그렇고 그 경악스러운 소음을 발생은 사람은 몹쓸 커플의 비호감 남자였다. 밉다, 밉다 하니까 별짓 다 하는 녀석이었다.


아침이 되자 산장 앞 눈부신 바닷물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곳이 트랙의 마지막 타이드 구간이었다.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는 조금 늦장을 피우는 나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우리 셋은 물이 빠진 아벨태즈먼의 바다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어 두 손에 들고 바지를 무릎 위까지 접어 올린 메리 아줌마와 나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첨벙첨벙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피터 아저씨는 뒤쪽에서 우리를 향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타이드 구간을 건넌 후 본격적인 트랙이 시작되었다.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는 걸음이 무척 빨랐다. 모두 비슷한 크기의 배낭을 메고 있는데도 나 혼자만 자꾸 뒤로 처졌다. 그때마다 메리 아줌마는 걸음을 늦추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메리 아줌마와 간격을 좁히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슨 아줌마가 저 나이에 걸음이 저렇게 재빠른지 모르겠다.


토타라누이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해변과 낯선 이국의 나무들이 울창한 숲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리는 예쁘게 생긴 물새가 해안가를 걸어 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이름 모를 동물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와, 정말 좋은 날씨지? 모든 것이 아름다워!”


두 손을 하늘 높이 들면서 메리 아줌마가 활짝 웃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자주 발걸음을 멈춰 온갖 식물종의 이름을 일일이 알려 주었다. 내게 뉴질랜드의 꽃송이 하나, 작은 새 한 마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려고 애썼다. 어린 뉴질랜드 팜트리를 가리키며 “너무 귀엽지 않니? 단단하게 자라야 할 텐데.”라고 말하는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의 얼굴에는 뉴질랜드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들은 정말로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고 있었다. 애국심이란 이런 것이구나, 새삼스러웠다.(우라나라 애국청년단은…….)


우리는 버스 시간에 딱 맞춰 토타라누이에 도착했다.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는 토타라누이를 지나 더 멀리까지 걸어간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버스가 언제 오는지 정류장이 어디인지 확인하면서 버스가 올 때까지 함께 기다려 주었다. 그들은 뉴질랜드에 다시 오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따뜻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어. 은퇴 후 아름다운 우리나라 어딘가에 작은 집을 지을 거야. 그리고 근사한 캠핑카를 하나 구입해서 가족들과 함께 항상 여행을 떠날 거야. 나는 그 꿈이 꼭 실현될 거라고 믿어.”


정말 멋진 꿈이었다. 지금쯤 개구쟁이처럼 눈동자를 반짝거렸던 메리 아줌마의 꿈은 이뤄졌을까? 그녀가 건네준 쪽지는 내 인생 어디쯤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들과 헤어진 후 넬슨으로 가는 버스에 짐을 싣고 근처에 앉아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향해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삼십 대 후반,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금발 머리 서양 여인 둘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벨태즈먼 트랙에서 죽을듯한 내 모습에 특히 걱정하며 돌아서던 그녀들이 기억났다. 두 사람은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키위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여행 중이라고 했다.


“와, 결국은 성공했구나! 그때는 꼭 쓰러질 것 같았는데.”


뭘요, 당신도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군요. 하지만 전 해냈답니다. 하하.


“배낭이 너무 무거워 보였어. 정말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전 의외로 능력 있는 여자라고요. 하하


“워터택시를 이용하면 배낭만 다음 산장에 미리 옮겨다 놓을 수 있었는데 혹시 그걸 몰랐니?”


……뭐라고요?


그랬다. 아벨태즈먼 트랙은 다른 그레이트워크에 비해 가장 수월한 코스로 워터택시라고 불리는 보트에 무거운 배낭을 맡기고 최소한의 무게로 트랙을 걸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여행의 모든 잔해를 쓸어 담은 거대한 배낭이 짓누르는 대로 땅에 달라붙어 트랙을 걸어갔던 나. 그리고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던 뉴질랜드 사람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이 안타깝게 여겼던 것은 나의 체력이 아니라 지력이었다.


“아, 정말 몰랐구나. 하지만 괜찮아. 자기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트램핑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 그쪽이 더 의미 있으니까. 어쨌거나 넌 트랙을 완주했잖아. 넌 튼튼한 머리 대신 튼튼한 어깨를 가지고 있으니까 상관없어. 그렇지?”


……지금 놀리는 건가? 그러니까 머리는 나쁘지만 몸은 튼튼해서 다행이다, 뭐 그런 뜻이냐?


“행운을 빌어. 넌 정말 강한 여성이야.”


……웃자. 이럴 때 웃는 자가 일류다.


그녀의 말처럼 어쨌든 난 트랙을 완주했다. 난이도 최하의, 보잘것없는 완주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뻤다. 드디어 고된 행군은 끝났다. 버스는 토타라누이를 출발해 아벨태즈먼 국립공원을 돌고 돌아 다섯 시간을 달렸다. 창밖으로 멀리 아벨태즈먼의 바다가 반짝거렸다. 아와로와 산장 앞 바닷가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어들고 한발 한발 나아갈 때 나를 향해 외쳤던 메리 아줌마와 피터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용감한 한국인! 아벨태즈먼 바다를 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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