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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와로아 산장 1

by 소다캣

트램핑 사흘째, 드디어 트랙을 따라 걷는 일이 괜찮아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주황색 둥근 표시가 있는 타이드 구간을 건너는 일도 아무렇지 않았다. 여전히 배낭이 무거웠지만 배낭 속 식량을 먹어 치우면서 점점 견딜만한 것이 되고 있었다


개봉하지 않은 여분의 깡통은 산장 찬장에 남겨두었고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유일한 지점에서(산장에는 쓰레기통이 없다. 모든 여행자는 자신의 쓰레기를 직접 들고 가야 한다) 딸기잼 유리병처럼 무게를 보태는 것들은 죄다 버렸다.


이젠 고개를 들어 주변 풍경과 바다를 바라볼 여유도 생겼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비틀비틀 기어가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드디어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트랙의 어느 지점에 이르자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아와로아 산장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다른 길은 비행장이 있는 사유지였다.(국립공원 안에 있는 사유지를 소유한 분이 누구신지 궁금해진다) 그곳에 ‘아와로아 로지’라는 카페가 있었다.


아, 카페라니! 문명과 동떨어진 야생에서 카페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건 허리춤에서 미지근해진 물이 아니라 얼음을 넣은 차가운 탄산음료를 마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카페는 아와로와 산장과 반대 방향이었지만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카페로 달려갔다.


그때 나는 한 자루의 모나미 볼펜을 통해서 이곳이 야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던 중이었다. 여행자들은 산장에 도착하면 해변에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했다. 늦은 오후가 되면 다들 저녁 준비로 분주하다. 수영복도, 코펠과 버너도 챙겨오지 않은 나는 산장 주변을 산책하거나 백사장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특히 여행 일기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만 필기도구를 깜빡 챙기지 못했다. (그 무거운 배낭 안에 꼭 있어야 할 생필품 대신 쓸데없는 물건이 더 많았다.)


그때까지 내게 필기도구란 손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굴러다니는, 굳이 찾지 않아도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이 사라진 세상이란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필통에는 스케치용 연필과 지우개뿐 필기구는 배낭 한 귀퉁이에서 나온 모나미 볼펜 하나가 전부이었다. 몇 번이나 배낭을 뒤져봤지만 딱 그 한 자루뿐이었다. 그때처럼 모나미 볼펜을 귀중하게 여겼던 적이 없다.


트램핑 둘째 날, 볼펜심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다음 언제 볼펜심이 떨어질지 몰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크베이 산장에서 투숙자를 위한 방명록과 그 옆에 얌전히 놓인 볼펜을 발견했을 땐 솔직히 그걸 훔쳐 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진짜 훔치진 못했다. 모나미 볼펜은 트램핑이 끝나기 전에 심이 모두 닳아버렸는데 문득 지금껏 끝까지 사용한 볼펜이 별로 없었구나, 생각했다.


아와로아 로지 카페에는 전기 콘센트가 있었다. 웨이트리스 아가씨에게 카메라 건전지를 충전할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밥과 야채, 넬슨산 샤도네이를 주문해 모처럼 식사 다운 식사를 했다. 트랙 중에 섭취한 인간 사료를 떠올리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음이 지난 3일 동안의 식단이었다.


[첫날 아침]

양상추도, 피클도, 마요네즈도, 케첩도 아무것도 없이 그저 식빵 3개와 얄팍한 햄 두 조각으로 이루어진 샌드위치와 물


[첫날 점심]

샌드위치와 물


[첫날 저녁]

샌드위치와 물


[둘째 날 아침]

샌드위치와 물


[둘째 날 점심]

샌드위치와 물


[둘째 날 저녁]

샌드위치와 물


[셋째 날 아침]

샌드위치와 물


그리고 중간중간 엄청난 양의 초콜릿과 건포도, 과자 부스러기.(남한으로 남파된 간첩 수준의 음식으로 연명했다.)


잠깐 동안이나마 와인을 마시면서 눈부신 날씨는 만끽한 후 다시 배낭을 멨다. 카페를 떠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같았다.


카페에서 나와 아와로아 산장으로 가는 길은 또다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앞서 지나온 갈림길로 되돌아가는 길이고 두 번째는 지름길로 지도에 아주 좁게 표시된 타이드 구간이었다. 사전에 체크하지 못한 새로운 구간이었는데 불과 3,40분 안에 아와로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 상으로 보면 미미한 바닷물이라 혹시 맨발로 건널 수 있을까 기대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호수처럼 보이는 물길이었다. 맨발로 걸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지도에 표시될 만큼 넓은 바닷물이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험한 숲이 우거졌다. 저녁 썰물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있는데 그냥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이 근처에서 빈둥거리다가 바다를 건너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데 멀리서 작은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카페의 로고가 선명하게 인쇄된 포장박스가 실려있는 걸 보니 국립공원 안에 문명을 배달하는 미니 잡화선 같았다. 배는 내가 서있는 곳에 정확하게 선체를 대고 짐을 내렸다. 요란한 선착 작업이 한동안 계속되었고 나는 조금 옆으로 비켜나 그 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에는 할아버지 선장님과 십 대 소년, 격투기 선수를 연상시키는 우람한 체격의 남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금발 여자, 무슨 일을 담당하시는지 잘 모르겠는 할머니 그리고 검은색 개가 타고 있었다. 어쩐지 미묘한 구성이었다. 그중 젊은 금발 여자가 나를 향해 생기발랄하게 웃어 보이면서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아와로아 산장.”

“태워줄까?”


마음씨 고운 금발 미인에게 축복을 내려주십쇼! 나는 냉큼 올라타 검정개와 함께 선체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작업을 끝낸 배는 더 넓고 맑은 바닷물을 향해 나아갔다.


금발 여자와 우람한 덩치 남자는 부부 사이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갓 태어난 작은 아기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보듬고 있었다. 부부와 아기를 지켜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년의 표정에도 기쁨이 넘쳐났다.


그들이 입은 낡은 작업복은 지저분했다. 붉고 거친 얼굴이 소박한 시골뜨기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전에도, 그 후로도 그처럼 행복으로 빛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금발 여자가 내게 말했다


“넌 정말 행운아야. 아와로아는 천국 같은 곳이거든.”


아와로아는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곳보다 아름다웠다. 금발 여자가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천국이 존재한다면 아와로아와 똑같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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