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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베이 산장 2

by 소다캣

둘째 날, 트랙이 점점 가파르게 변하면서 본격적인 등산길로 접어들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10분에 한 번씩 주저앉으면서 바크베이로 향했다.


아벨태즈먼 트랙은 비교적 자유롭게 일정을 세울 수 있다. 인원 제한도 없고, 바다에는 워터택시가 오가기 때문에 트램핑을 시작하는 지점도 자유로운 것 같았다. 덕분에 트랙 중에 반대 방향에서 오는 여행자들과 종종 마주쳤다.


좁은 길을 공유할 때마다 여행자들은 예의처럼 웃으면서 ‘하이’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주치는 이들이 웃음 대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사말도 어느새 ‘너 괜찮니?’로 바뀌었다. 어떤 이는 배낭에서 직접 초콜릿을 꺼내 주면서 제대로 음식을 먹고 있냐며, 트랙 중에는 반드시 초콜릿이나 사탕처럼 열량이 높은 간식을 먹어줘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쓰러질 것 같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낯선 외국에서 내가 죽을까 봐 걱정하는 외국인이 이렇게나 많다니 감동이었다.


트랙을 걷는 여행자는 다양했다. 부부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도 있었고 중년의 부부도 있었고 삼십 대 여자들 몇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도 있었다.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건 두세 명으로 구성된 젊은 여행자들이었다.


그중에는 커다란 배낭을 멘 남자와 비교적 작은 배낭을 멘 여자 커플도 있었다. 부부인지 연인인지 모르겠지만 남녀가 함께 여행을 떠날 때는 주로 남자 쪽에서 궂은일을 도맡는 모양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남자 몫까지 짊어져야 하는 박복한 여인들도 있을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건장한 남자 노예를 거느린 여자 여행자를 보면서 직접 짐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나 자신이 비천하게 느껴졌다. 당시 나는 여성은 오직 연애 활동만으로 피라미드 상부층에 오를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물론 그럴 리 없다. 살아보니 여자에게도 남자에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처 주목하지 못했지만, 트랙을 걷는 여행자들의 배낭은 내 배낭처럼 거대하지 않았다. 넬슨의 백패커스를 떠날 때 직원이 프런트에 배낭을 맡길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여벌의 배낭도 없었고 짐을 따로 빼놓기도 여의치 않아 그냥 짊어지고 다니기로 했다. 그래서 다른 여행자들은 어딘가에 짐을 맡기고 온 모양이구나, 그렇게만 생각했다. 워터 택시를 이용해 배낭을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일찌감치 도착한 바크베이 산장은 앵커리지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그곳은 해변과 조금 떨어진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닷가로 나가려면 얼마간 걸어가야 하는 대신 이어지는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저수지처럼 생긴 물가가 나타났다. 바닷물이 좁은 입구에서 밀려 들어왔다가 썰물이 되면 다시 빠져버리는 그런 곳이었는데 물결이 잔잔하고 파도가 일지 않아 호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발을 담가보니 물 온도가 따뜻했다. 아마도 뜨겁게 달궈진 땅으로 적은 양의 바닷물이 올라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뉴질랜드는 남극과 가깝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바닷물이 차갑다. 뉴질랜드에서는 바다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바크베이 산장에는 두 가족이 묵고 있었다. 대여섯 살부터 십 대 청소년까지 모두 일고여덟 명의 아이들이 잔디마당에서 뛰어놀거나 해변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여행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바크베이를 건너뛰고 앵커리지에서 바로 아와로와 산장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산장 입구에 서서 초등학교 4~5학년 정도로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남동생이 조금 덩치 큰 사춘기 누나에게 계속 장난을 치며 까불다가 결국 누나에게 멱살을 잡혀 앞뒤로 마구 흔들리는 광경을 구경한 다음,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물가로 향했다.


바크베이를 찾은 가족들은 이 고요한 물가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곳을 얼씬거리는 사람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한낮인데도 조금 어두웠고 파도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그곳에서 혼자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다가(도대체 왜 이런 스케치 도구 같은 것을 죄다 챙겨 왔는지 모르겠다. 폴옵션 화장품케이스와 더불어 내 어깨를 짓누르는 2대 필요악이었다.) 독서도 스케치도 시들해지자 한쪽 편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혼자 시간을 보냈다.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해변과 달리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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