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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캣 Mar 30. 2024

카이코우라

뉴질랜드 밀레니엄 여행기 8화

카이코우라 바닷가는 모래 대신 검은색 둥근 돌이 끝없이 펼쳐진 자갈 해변이었다. 작고 반들반들한 검은 돌과 투명한 터키쉬블루 바다색이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멀리 바닷가 끝으로 만년설이 쌓인 산 능선이 신기루처럼 보였다. 


역시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처럼 기억에 남는 인생의 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뜨겁게 달궈진 자갈 위에 앉아 미래가 어떤 형태로 다가오건 지금 바라보는 카이코우라의 바다만큼 아름답길 기도했다. 바다의 표면이 태양빛으로 번쩍거렸고 고래는 끝내 볼 수 없었다. 


인터시티가 픽턴을 향해 출발했다. 모든 것이 느슨한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정확한 시간 엄수였다. 버스 기사님은 출발하겠다고 공표한 그 시간에 정말로 출발했다. 몇 명의 승객이 카이코우라에 이끌리듯 짐을 챙겨 내렸고 한두 명이 카이코라에서 버스에 올랐다. 


창밖 풍경이 조금쯤 지루하게 느껴질 즈음 갑가지 인터시티가 서버렸다. 잘 달리던 대형 버스가 갑자기 왜 길 한복판에 멈춰 섰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버스가 정지했다. 


버스 기사님은 카리스마가 대폭 줄어든 목소리로 몇 가지 안내를 했다. 픽턴이 목적지였던 사람들은 몇 분 후 곧 도착한 작은 버스로 갈아탔고 넬슨으로 가는 나 같은 사람들은 기사님의 “기다려라.”라는 한 마디에 도로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예상대로 카키 유니폼 무리도 넬슨 행이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함께 출발한 동양인 청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넬슨으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짐작대로 일본인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뉴질랜드는 항상 이래. 뭐든지 뒤죽박죽이라니까. 일본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는 조용히 분노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거리곤 대꾸하지 않았다. (뭐 어쩌라고)


한낮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멈춰 선 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의 인터시티 정류장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임시 버스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었고 낙천적인 카키 유니폼 소년들은 무엇 때문에 고장을 일으켰는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벌써 한참 동안 기다리는 중이었다. 


“무슨 고장이 났는지조차 설명하지 않잖아. 저 운전기사는.”

일본인 청년이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고장의 원인이나 기사님의 불친절함, 어처구니없는 뉴질랜드의 교통 시스템보다 대체 언제쯤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하필 이럴 때 화장실에 가고 싶다니, 당연히 버스가 세워진 허허벌판에 화장실이 있을 리 없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당장 화장실에 갈 수 없다는 것보다 앞으로 얼마를 기다려야 정상적인 버스가 도착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한 시간이면 될까? 뭐 하늘이 도우신다면 어떻게든 그때까지 견딜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아아, 생각만 해도 무섭다. 


일본인 청년과 마찬가지로 나의 가슴속에서도 분노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진국 뉴질랜드! 너희의 허접스러운 교통 시스템 때문에 말도 안 통하는 낯선 타국에서 절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정말이지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빨리 나를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란 말이다!


약 한 시간 후, 이름 모를 도시의 인터시티 정류장 앞에서 여전히 즐거운 카키 유니폼들과 여전히 분노한 일본인 청년, 그리고 나는 다시 또 버스를 기다렸다. 족히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이 작은 정류장에는 깨끗한 화장실이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었고 우리를 태운 대형 버스가 이제 대관령고개보다 더 구불구불한 좁은 산길을 이리저리 통과하는 중이었다. 넬슨이 가까워지면서 창밖의 풍경이 광활한 들판에서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벌써 뉘엿뉘엿해지는 숲길의 어두운 하늘을 보면서 버스가 깊은 산중으로 들어선 것을 실감했다. 이곳은 진짜 ‘시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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