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nine Jul 18. 2022

한 방울 한 방울

예전에 살던 아파트 베란다에서는 물을 한 방울씩 받으면 계량기가 돌아가지 않았다. 평지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집 안에서 볼 수 있다는 점, 택배를 대신 받아줄 수 있는 경비실이 있다는 점, 분리수거가 용이하다는 점 등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장점이 있을 텐데, 돈이 나가지 않고 물을 쓸 수 있다는 점. 그 점만이 당신이 느끼는 그 집의 유일한 장점이라는 듯 할머니는 매일같이 한 방울 한 방울을 양동이에 모아 빨래도 하시고 야채도 씻으시고 밥도 지으시곤 하셨다.


뭐든지 아끼는 분이셨고 부지런한 분이셨다. 편찮아지시기 전까지 매일 길에 나가 야채를 팔면서 밥벌이를 하셨고 웬만한 거리는 버스도 타지 않고 항상 걸어 다니셨고 추운 겨울에도 보일러 온도를 올리는 것보다 옷을 한 겹 더 껴입으셨다. 반가운 전화가 걸려와도 짧은 대화 끝에 는 항상 전화세 나오니까 끊으라는 말로 마무리를 하실정도였으니 어지간히 아껴 쓰는 것에 강박이 있으신 분이었다.


내 기억 속 우리 집은 그렇게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렇게 모든 걸 아끼면서 사셨을까.

나는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당신 삶의 아주 일부일 뿐일 텐데 스스로 할머니에 대해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궁금해하거나 이해해보려거나 하지 않았었다. 그녀의 학창 시절, 젊은 시절, 그 시대 여성으로서의 시간. 내가 모르는 수많은 시간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고 남편을 잃고 네 아이의 부모로서 살아온 시간들.


이제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대신해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디선가 주워들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빗대어 혼자 상상해볼 뿐이지만, 그 시간 속에서 할머니는 아마도 그렇게 살아야만 했었던 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아껴야만 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해야만 했던 삶. 살아남기 위해 강요받았던 생존 방식을 버릴 생각조차 못했던 건 아니었을까?


내 마음속에는 항상 그런 할머니에 대한 빚이 있다. 이자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데 더 이상 갚을 길이 없는 채무. 모든 걸 아끼시면서도 인색하지 않고 아낌없이 베풀었던 사랑에 대한 부채감. 나는 왜 그리도 사랑에 인색한 사람이었을까. 왜 받을 줄만 알고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만한 것들이 천천히 한 방울, 한 방울.

작가의 이전글 써야지 써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