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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Oct 05. 2020

척척석사입니다

국제개발협력분야의 일과 학위에 대한 단상

한 번은 일터에서 오전엔 "저는 척척석사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오후엔 "박사 학위는 우리 업계(국제개발협력)에서 면허증과 같으니 일단 무조건 따고 봐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집에 오는 길에 학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손석희님은 저널리즘 석사이자 자칭 '미세먼지 척척석사'라고 한다. 캡쳐: JTBC News 유튜브.


오후의 이야기는 선배 활동가가 자신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며 해 준 이야기이다. 국제개발협력 업계에서 박사학위가 있으면 전문가 등급이 빠르게 올라가고, 특히 국제개발협력 용역 사업 참여 시 더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등등의 장점이 있는데, 그가 듣기론 그 박사 학위를 어디서 어떤 연구로 땄는지는 그다지 따지지 않으니 딸 수 있는 곳에서 되도록 빨리 따 두라는 것이었다. 요즘 국제개발협력 업계에서 ODA 사업의 수행인력으로 들어가려면 모두가 "나는 '전문가'입니다"라고 뻔뻔히 말할 줄 알아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전문가'임을 아주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학위의 힘이 갈수록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오전의 '척척석사' 이야기는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라 자세히 풀긴 어렵지만, 대략 '아, 박사는 아주 특정 분야에서만 박사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주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그 박사님이 미쳐 생각지 못했던 것을 석사인 내가 생각해냈으니 나는 '척척석사'라고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근데 이 생각은 따지고 보면 나의 현장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 대학원 과정에서 나온 것은 아니니 딱 들어맞는 농담은 아니었다. 


몇 해 전, 나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석사 학위를 따겠다며 영어도 잘못하는데 영국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데에는 학부과정에서 아프리카 공부를 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포함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도 꽤 컸다. 예전에 어디선가 박사학위는 그 분야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문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면허증과 같은 것이라,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보다 박사가 된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에도 아프리카와 관련된 글을 쓰던 나는, 이 이야길 듣고 단순히 '아, 박사 학위를 따야 내가 나의 글을 잘 쓸 수 있게 되겠구나' 생각했었던 것 같다. 


석사 이후, 나는 박사 과정 대신 현장으로 돌아왔고 글도 계속 쓰고 있다. 그런데 석사 전후 비교를 해보면, 석사 이후의 글쓰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조금이라도 배우고 알게 된 주제에 대해,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 각국의 선거라던지 민주주의에 대해서 글을 쓴다면 다양한 방면에서 고려할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고 어떤 자료들을 봐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알아서 글을 완성하기가 어렵고, 잘 모르지만 그래도 소개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선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더 철저히 조사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건 일할 때도 비슷하게 적용되는데 어떤 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할 때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현지 맥락을 더 집요하게 파악하려 하고, 보고서나 제안서의 논리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렇게 석사 전후를 비교해보니, 왜 박사학위를 면허에 비유했는지 알 것도 같다. 나는 대학원 과정을 통해 조금 더 '안전운전'하게 되었다.


컴퓨터공학 박사인 Matthew Might가 그린 Ph.D.의 의미. Picture: matt.might.net


<The illustrated guide to a Ph.D.>을 쓰고 그린 Matt Might는 위와 같은 그림을 통해 Ph.D.가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했는데, 저 그림은 "당신이 딴 박사학위는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아무것도 아닌 좁살만한 돌기에 불과해요"라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잊지 않으면서도 계속 밀고 나가라는 의미의 그림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그림을 다방면에서 '전문성'을 뽐내는 이들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의 연구 분야 밖에선 신중하게 처신하고 남의 말도 좀 듣고 배울 생각을 해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의 박사 연구 주제와 국제개발협력의 프로젝트 주제가 일치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유관 박사 학위에 5년 정도의 경력을 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진 위 그림의 '돌기' 같은 전문성이 프로젝트에 쓸모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하나의 연구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고, 그 프로젝트와 관련된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으며, 기본적인 연구 방법론이나 연구 윤리와 관련된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이야길 앞서 이야기한 면허 이야기에 다시 연결 지어 박사학위를 운전면허라고 상상해 본다면, 박사학위라는 면허를 딴 사람이 운전대를 잡은 자동차는 사고위험이 훨씬 낮고 안정적일 것이라고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박사가 아닌 석사니까 석사는 어디쯤 일지 생각을 해보았다. 계속 운전면허 비유에 연결해 보자면, 나는 석사 과정을 통해서 무면허보다는 조금 더 안전운전 할 수 있는, 혹은 원동기 면허 같은걸 따서 오토바이 정도는 몰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건 아닌가 싶다. 


2017년 7월. "카가메 폴을 뽑자" 깃발을 꽂고 달리던 오토바이 택시 위에서. Photo: 우승훈


하지만, 한국에서 운전면허(A라는 주제로 박사/석사 학위)를 딴 사람이 탄자니아에 가서(B주제에 대한 연구/사업을 수행할 때도)도 운전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가끔 대규모 ODA 사업에 투입되는 전문가들에게 돌아가는 비용과 그들이 생산한 결과물을 보며, 이 돈을 현지의 사람들에게, 현장의 사람들에게 더 투자했으면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물론 사업 형성을 위해 사전 조사를 하고, 프로젝트를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일 등은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어쩌면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현장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항상 귀 기울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잠깐씩 출장으로 오가는 '박사님'이나 '전문가'들이 아니라 현장의 활동가, 특히 그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지 직원들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렇게 현지 직원들의 역할이 중요한데도 현지 직원(Local Staff)들이 현지 기준에서는 외국인(Expat)인 우리 같은 파견 활동가나 가끔 오가는 전문가들에 비해 받는 대우는 너무나 떨어진다. (현지 직원과 외국인 직원의 차별에 대해선 이 기사에서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다: https://www.theguardian.com/global-development-professionals-network/2017/jul/25/secret-aid-worker-expats-local-staff-value-international-development?CMP&fbclid=IwAR2ryvuG-zX2aa-lqU4a-G1LcqOSs79FQS8XfujpnbyHM5bSOBzDNmcRrEo)


국제개발협력 분야에는 석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고, 지금도 이 일을 하기 위해선 석사 이상의 학위가 필요한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국제개발협력이라는 분야는 도대체 이 분야가 포괄하는 일의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넓다. 어떤 일은 정말 박사급의 학문적 엄밀함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어떤 일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학력을 가졌는지와 전혀 무관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일의 다양성이나 본질에 대한 고민 없이 학위에 대한 소문만 둥둥 떠다니거나, 높은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하는 일에 더 많은 보상과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경력 지긋한 분들의 무용담이 아닌 지금 실무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한 이 분야 일에 대한 정보와 다양한 경험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제개발협력의 철학과 업으로써의 국제개발협력의 본질에 대한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나도 실무자인터라 다들 바쁘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실무자들이 이 고민을 발전시키고 이 분야의 '판'을 짜는데 참여하지 않으면, 학위라는 '스펙'을 가지고 의제와 방향을 만드는 '일'을 맡는 사람들의 시각만 담긴 판에 갇혀버릴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이렇게 당연한 이야길 자꾸 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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