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케냐 웨스트게이트 쇼핑몰 테러 사건 용의자 2명 유죄 판결
2013년 9월 21일 토요일 점심 즈음, 총기를 든 괴한들이 케냐 나이로비의 대형 쇼핑몰인 웨스트게이트에 침입, 총격을 시작했다. 같은 날 나는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의 정산 우후루피크(Uhuru Peak)를 찍고 하산하던 길이라 사건 시작 다음날 바로 현지 미디어를 통해 소식을 들었고, 인접국가 도시에도 유사한 공격이 이어지지 않을지 걱정했었던 기억이 난다.
사건 직후, 소말리아를 주 근거지로 하는 무장단체 알-샤바브(Al-Shaabab)가 이번 공격이 자신이 소행이며, 후에 소말리아 정부로 인정받게 되는 소말리아 연방 임시 정부(Transitional Federal Government of Somalia)와 함께 소말리아에서 대 알-알샤바브 군사작전인 'Linda Nchi'(국가를 지킨다는 뜻의 스와힐리어로,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이어진 합동 군사작전)를 펼친 케냐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했다. 진압까지 나흘동이나 걸린 이 공격으로 62명의 민간인과 5명의 군경, 그리고 4명의 범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냐 당국은 사건 직후에는 무장한 침입자가 10명에서 15명 정도 된다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무장한 범인은 4명이며 모두 현장에서 사살되었다고 앞선 발표를 정정했다. 4명에 대한 포렌식 결과는 지금까지도 공개된 바가 없어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의혹은 계속되고 있다.
한동안 웨스트게이트 테러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어제(10월 7일), 이 공격을 공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피고 3명 중 2명에겐 유죄 판결이, 1명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피고 3명은 모두 소말리 민족이며, 2명은 케냐 국적, 무죄를 받은 1명은 난민 신분인 것으로 보인다. 판결에서 재판부는 피고인과 테러 현장에서 사살된 무장 테러리스트 사이의 전화 통화 기록과 테러 공격을 돕기 위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를 판결의 근거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이 재판은 웨스트게이트 테러와 관련하여 진행 중인 유일한 재판인데, 2014년 1월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140명이 증언했고, 테러 공모 혐의로 기소된 3명은 모두 혐의를 부인해왔다. 이날 유죄를 받은 2명의 형량은 10월 22일 내려질 예정이고 최대 형량은 20년이라고 한다.
이번 재판으로 적어도 누군가는 이 테러 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되겠지만, 사건의 전말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테러의 동기는 무엇인지, 왜 웨스트게이트였는지, 실제 무장 침입자는 몇 명이었는지, 왜 진압까지 그리도 오래 걸렸는지 등에 대해선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고, 시간이 지날수록 사건의 진실은 희미해질 것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Human Right Watch의 Otsieno Namwaya 선임 연구원은 이 재판에 선 세명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주모자도 아니고, 심지어 공격자도 아니"고, "공격자들은 도망갔고, 주모자는 여전히 파악되지 않았으며, 이 세 사람은 곁가지 정도일 뿐"이라며 케냐 정부의 사건 조사와 후속 대응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테러로 인한 사망자 명단에서는 한국인 1명과 가나의 외교관이자 시인이었던 코피 아우너(Kofi Awoonor), 그리고 다수의 나쿠마트(Nakumatt) 직원 등을 볼 수 있는데, 이들 희생자 중에는 현직 대통령인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의 조카도 있었다. 케냐타 대통령의 조카가 운 없이도 우연히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인지, 테러리스트들이 일부러 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케냐타 집안과 소말리 사람들의 악연은 케냐가 독립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했지만, 그 직후 사실상 내전 상태에 놓이게 된다. 케냐의 북동부 지역은 소말리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고, 독립 이전 영국으로부터 범-소말리아 국가로 독립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지역인데, 독립 과정에서 케냐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이에 추정컨데 소말리아 본국의 지원을 받은 소말리인 세력과 케냐 정부는 충돌을 겪기 시작했고, 케냐 정부는 그들을 소말리어로 도둑, 반란자를 뜻하는 'Shifta'라 부르며 차별하고 억압했다. 이때 케냐 정부는 초대 대통령이자,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가 대표하고 있었다. 아버지 케냐타 대통령은 훗날 'Shifta War'불리게 되는 이 내전 상황을 꽤나 잘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케냐에 포함되길 거부하는 소말리인들 일명 'Shifta'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고, 이들을 도둑(Shifta)이라 부르며 이들과 구분되는 '케냐 국민'의 이미지를 만들고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순종적이며 도둑질을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케냐 국민'이며, 정부는 이러한 '국민'만을 보호한다는 메시지를 소말리인들에 대한 차별과 폭력으로 보여주었다.
Shifta War의 여파는 1984년 와갈라(Wagalla) 대학살까지 이어진다. 이 사건은 케냐군이 케냐-소말리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케냐 북동부의 와갈라에서, 부족 간 갈등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5,000명가량을 처형한 사건이다.
이렇게 해묵은 소말리 민족과 케냐타 집안, 혹은 케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키쿠유(Kikuyu) 민족의 갈등은 2013년의 웨스트게이트 테러, 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2014년 알-샤바브의 음페케토니(Mpeketoni, 이곳은 원래 무슬림들이 많이 살던 지역인데, 조모 케냐타 대통령이 땅 없는 케냐인들을 위한 정착지로 개발, 키쿠유 민족이 대거 이주해왔다고 한다) 공격, 2015년 15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케냐 북동부 지역의 가리사 대학교 사건 같은 대형 참사에서도 그 흔적이 느껴지며, 여전히 소말리아와 케냐 북동부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봤을 때, 현재 소말리아에서 알-샤바브를 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케냐 군을 포함한 아프리카 연합군(African Union Mission in Somalia (AMISOM))의 군사행동이 성공을 거두더라도, 케냐 내의 소말리 민족에 대한 차별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 해묵은 갈등은 계속될 것이다. 차별로 인한 좌절과 분노는 알-샤바브와 같은 극단주의 단체에겐 생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제목 배경 사진: 웨스트게이트 공격 당시 각각 9살과 21개월이었던 두 자녀와 함께 숨어 엎드려있던 Faith Wambua의 모습. 이들은 나중에 경찰에게 구조되었다. Tyler Hicks/The New York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