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계속해보겠습니다
10월과 11월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의 시간이었다. 10월 중순엔 아프리카인사이트의 청년기자단 아이네디터님들에게 아프리카와 국제개발협력, 글쓰기 이야기를 했고, 10월 말엔 국제기구 협력사업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 결과공유회에서 여러 단체 대표님들과 중간관리자님들 앞에서 우리 단체의 국제기구 파트너십 전략을 발표했다. 그리고 11월 초에는 사업 제안과 관련된 면접 심사에서 사업 내용을 발표했고, 11월 말에는 국개협UP 팀의 일원으로 지난 7개월간 진행한 "국제개발협력 계속해보겠습니다: 국제개발협력 시민사회 2030활동가의 활동 실태와 지속가능성 연구"의 결과를 연구를 지원해준 서울시NPO지원센터와 국제개발협력학회 시민사회분과에서 각각 발표했다. 다섯 번 다 무척이나 긴장하고, 숨이 차도록 말했으며, 마치고 나선 내가 무슨 말을 했나 싶었다.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김하나 작가님이 글은 읽는 사람이 충분히 시간을 들여 다시 읽을 수도 있지만, 말은 그렇지 않으므로 '말하기는 너무 빽빽해선 안된다'고 했는데, 나는 목과 어깨에 한껏 힘을 준 채 말을 했던 것 같다.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일관되게 I(내향형)가 나오는 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보다는 글로 내놓기를 선호한다. 아니 글쓰기를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내 목소리 톤이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말을 할 때 사람들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사람을 대면한 채 말하면 반응을 바로 느낄 수 있고 나는 사람들 반응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르완다에 가기 전, 영국에서 공부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정확히 어떤 과목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두 동기와 함께 팀으로 발표를 할 일이 있었다. 나름 발제문도 쓰고 읽어보면서 연습도 했건만 막상 그 두 친구가 유창하게 말하고 난 뒤에 발표하자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얼어버렸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는 앞 두 친구처럼 유창해야 사람들이 좋아하겠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래서 준비한 발제문도 없이 사람들 앞에 서버렸고, 한 두 문장을 말하곤 사람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착각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팀원이 그 상황을 급히 수습하고, 수업이 끝난 뒤엔 자신의 배려가 부족했다며 위로도 해줬지만, 그날의 악몽은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그 뒤로 르완다에서 PM을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말할 일이 많이 생겼지만, 이때는 좀 나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외국인이 뭔가 말한다는 사실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로워했고, 많은 경우 중간에 영어-르완다어 통역을 거쳐야 했기에 자연스럽게 쉬어가며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여 동안 많이 사람들 앞에 서서 수도 없이 이야기했고, 이제 사람들 앞에서 얼어버리는 경우는 더는 생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역시나 '하면 는다'(이것도 김하나 작가님 "말하기를 말하기"에서).
작년에 한국에 돌아온 뒤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뭔가 발표할 기회가 생겼을 때, 좀 부담스러운 자리라 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선배는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내 생각을 말할 기회는 흔치 않다고, 이것도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고, 해서 손해 볼 거 뭐 있냐며 적극적으로 권했고, 덕분에 내 기준에 내 생애 가장 신나고 뿌듯한 발표를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어디선가 발표/강연 요청이 오면 웬만하면 다 하겠다고 한다. 나를 찾아준다는 게 감사하고, 좀 쑥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생각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게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말해야지 마음먹는 것과 말하기를 잘하는 건 또 별개의 일이다. 발표가 끝나면 주변 사람들이 "발표 잘했어?"라고 물어보곤 하는데, 나는 보통 "발표했어"라고 답한다. 발표를 끝내고 나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구나, 이 말을 했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천천히 말했어야 했는데,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지루해했던 것 같은데, 시간 아깝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와 같은 후회와 걱정이 밀려와 찝찝한 기분으로, 벌써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발표를 복기하며 집으로 향한다.
11월 말 했던 국개협UP의 발표에서도 나는 힘이 한껏 들어갔다. 그 두 번의 발표에서는 특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연구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냥 조용히 진행되고 끝날 연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가졌고, 결과가 기대된다고 이야기해준 사람들과 이 연구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시간과 경험을 나눠준 사람들이 많았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해야 하는 이야기도 너무 많았고, 결국 힘도 많이 들어가고 말도 빨라졌다. 끝나고 생각하니 그렇게까지 힘이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아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지만, 내가 한 이야기의 부분 부분을 흥미로웠다, 좋았다 하는 분들도 조금 있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이날의 이야기, 연구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보겠다)
여기저기서 말로 생각을 전하면서, 말은 글보다 휘발성이 강하고 전달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더 많은 감정을 실을 수 있고 눈을 마주치며 전할 수 있기에 울림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쓰기와 말하기는 연결되어있기에 내가 계속 쓰는 사람으로 지내는 한 때때로 말하는 사람도 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말하기의 재미를 좀 보았으니, '하면 는다'의 마음으로, 매 기회를 힘은 빼고 말하기는 나아지는 기회로 삼아 계속해볼 셈이다. 그러니 혹시 말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불러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