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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Dec 29. 2019

외로움과 소외 사이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

(영국에서 석사 논문을 쓰던 2016년 10월의 어느 날 쓴 글을 거의 그대로 옮김 / 아래 글은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님이 한겨레에 쓴 칼럼을 읽고 내 고민을 더해 쓴 글임)


정희진님의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4491.html?fbclid=IwAR3gfs-qFl8I6_59MihT2kCTuyapDXAtzPPjVTbrnp3OXi1-0Ta-KyqHHYI


요즘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통은 사람들이 있는 도서관이나 스타벅스에서 논문을 쓰고 있으니 물리적으로 혼자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소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친구들의 삶과는 동떨어져서 이런 거에 누가 관심이나 있을까 싶은 '탄자니아의 야당과 민주주의 공고화'같은 주제의 논문을 쓰고 있노라니 '혼자'된 느낌이 많이 많이 든다. 


영국 브래드포드. 사진: 우승훈


이렇게 혼자 '논문을 쓰는 일'은 아주 아주 괴롭지만, '혼자' 논문을 쓰는 일은 크게 힘들거나 외롭지는 않다. 오히려 한창 집중할 땐 사람들을 피하곤 한다. 도서관 바로 건너편 자리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부러 인사를 안 한다거나, 저 멀리 길에 아는 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이면 괜스레 피해 가거나 고개를 푹 숙이곤 한다.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가득인데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이야깃거릴 찾는 게 (그것도 영어로!) 나에겐 쉽지 않다. 정희진님의 글에서처럼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 외롭지 않'기 때문일까? 정희진님이나 정희진님의 글에 예시로 나오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게 내 인생을 비교하기엔 너무 부끄럽고, 그냥 원래 타고나길 좀 '사적인 인간'으로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모두가 잠드는 밤을  좋아하고, 모두가 친해져야 하는 공간보다는 서로 약간씩 무관심한 공간을 더 좋아한다. 

 

그렇지만 혼자됨은 여전히 두렵다.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소외 때문이다. 갈수록 공통사가 줄어만가는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멋지게 해 나가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심지어는 아직 관계도 많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나와 비슷한 일을 하거나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외당함, 그런 게 두렵다. 


실력과 마음보다 인맥이(요즘은 보통 '네트워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다) 더 중요해 보이는, 소위 '관계사회'라고 하는 한국사회에서  혼자되기를 택하는 것은 곧 '소외'당하기로 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 그렇게 되길 택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외로움이 괜찮고 혼자됨을 좋아한다고 해서 소외당하는 것을 택한 건 아니다. 


소외와 외로움은 꽤나 다르다. 외로움은 그냥 외로움이다. 때때로 찾아왔다가 떠나가고, 때론 내가 택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외로움은 '함께함'과 함께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때때로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적절한 외로움은 함께함을, 적절한 함께함은 외로움을 더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런데 소외는 '당하는'것이다. 소외는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는다. 소외의 공포에 질려 관계 속으로 도망치곤 하지만, 결국 더 큰 소외감과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이 남는다. 


주절주절 쓰다 보니 '날 떠나지 말아요'라고 말하는 글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날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 많이 들어서 두려웠다. 우리가 공통사도 적고, 가끔은 신념이 다르기도 하고, 내가 연락을 잘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고, 언젠가는 다시 교차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너무 큰 욕심이었을까? 


소외를 실력과 배짱만으로 돌파할 레벨은 안되고, '네트워킹'같은 거 잘 못해서 좀 배워야 하나 고민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뭐고 간에 일단 먹고살아야지 같은 고민도 하고, 이런 고민들에 대해 매일매일 생각들이 바뀌는 것 같지만 아무튼 정희진님의 글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 적어도 나랑 비슷한 인류가 꽤 있겠구나 하는 위안을 얻었고, 겁에 질려 관계 속으로 숨지는 말아야지 새삼 다짐해 볼 수도 있었다. 어떻게 결론을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내 글 대신 정희진님의 아름다운 글에서 한문단 빌리며 마무리하련다.  


한국은 ‘관계사회’다. 연대와 상부상조가 아니라 인맥을 관리하며 사익을 도모하는  ‘우병우·이건희·나향욱·진경준’ 식의 관계, 연줄, 세습 사회다. 이 궤도에 끼지 못하면 낙오했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내 주변의 진보남, 페미니스트, 각종 소수자 대표 중에서도 유명인이 되기 위해 노력과 인격 대신 종일 전화통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 많다. “여럿이 함께”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일 수 있을 때만 가능하고 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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