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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Jul 28. 2018

독재 37년, 무가베의 은퇴

2018 짐바브웨 총선 (1) 로버트 무가베: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

짐바브웨의 전 대통령 로버트 가브리엘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는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했을 때부터 2017년 11월까지 37년 동안 짐바브웨를 통치했다. 그리고 7월 30일, 짐바브웨에서는 무가베 없는 첫 번째 총선이 치러진다. 

로버트 무가베. Photo: Flickr / Al Jazeera English


로버트 무가베가 오랜 기간 몸담았고 여전히 여당인 ZANU-PF의 에머슨 음난가과(Emmerson Mnangagwa) 대통령과 야당 MDF(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의 넬슨 차미사(Nelson Chamisa) 후보가 설문조사에서 3% 차이로 접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Afrobarometer), 많은 언론은 여전히 무가베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Afrobarometer의 짐바브웨 대선 설문조사 결과. 

 

로버트 무가베는 1924년 2월 21일,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남부 로데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 태어났다. 젊은 날의 무가베는 교육자이자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남부 로데지아의 몇몇 미션 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공부도 계속 이어나가 1952년에 남아공의 포트 하레 대학교(University of Fort Hare) 대학교에서 역사와 영어 학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포트 하레 대학교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행되기 이전까진 흑인 고등교육의 중심으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와 보츠와나의 초대 대통령 Seretse Khama, 레쇼토의 세 번째 국무총리 Ntsu Mokhehle 등이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무가베는 남아공에서 공부하는 동안 맑시즘을 알게 되었고, 아프리카 민족 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에 참여했다.


남아공에서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무가베는 식민지 체제에 깊은 적대심을 품게 되었지만 바로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남부와 북부 로데지아와 가나를 오가며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을 탐독했고 통신 학습을 통해 남아프리카 대학교(University of South Africa)에서 교육학 학사 학위를, 런던 대학교(University of London)에서 행정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2008 총선의 무가베 포스터. Photo: Flickr / Frontline Blogger

 

무가베가 가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남부 로데지아에서는 아프리카 민족 운동이 시작되었고, 1960년 돌아온 무가베도 동지들과 함께 민족 민주당(National Democratic Party, NDP)의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다른 운동과들과 달리 해외 경험도 있고, 학위도 세 개나 있었던 무가베는 이내 NDP의 중심으로 떠올랐고, 당의 간부로 선출되었다. 소수 백인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부 로데지아 정권은 아프리카 민족 운동을 철저히 방해했고, 조직의 해체와 재결성을 반복하며(NDP -> ZAPU -> ZANU) 저항하던 무가베와 그의 동지들은 투옥되었다. 


이후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은 게릴라 전술로 로데지아의 백인 정부를 끝없이 괴롭혔고, 결국 1974년 무가베와 동료들은 풀려나게 된다. 풀려난 무가베는 모잠비크로 넘어가 맑시스트인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 대통령과 중국, 쿠바, 소련, 북한 등의 지원 아래 ZANU(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를 장악하고 로데지아 정권과의 게릴라 전쟁을 지휘한다. 이 과정에서 무가베는 백인 로데지아 사람들을 착취자, 인종차별주의자 등으로 비난하며 백인들 소유의 땅을 회수하고 로데지아를 일당 맑시스트 국가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약 4년여의 게릴라 전쟁 끝에 로데지아 백인 정권과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런던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민주적인 다수 정권 수립과 소수 백인들의 재산을 보장하는 것에 합의했다. 1980년 치러진 짐바브웨이 첫 선거에서 무가베의 ZANU-PF는 63%를 득표하며 80개의 국회 의석 중 57개를 차지했고, 무가베는 총리가 되며 그의 기나긴 짐바브웨 국가수반의 경력을 시작했다.


무가베는 독립운동가, 해방자로 명성을 얻어 짐바브웨의 수장이 되었지만 그는 이내 독재자로 변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선거를 조작하고,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독재자 무가베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희생자는 은데벨레 민족이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지만 노선이 달라 갈등을 계속 겪던 조슈아 은코모(Joshua Nkomo)의 출신이기도 한 은데벨레 민족은 1980년대 초반 은코모의 ZAPU(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와 무가베의 ZANU-PF의 갈등에 휘말리는데, 무가베는 ZAPU의 씨를 말리기 위해 북한에서 훈련받은 제 15 여단을 보내 군사작전을 진행했고, 그 결과 20,000명의 은데벨레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이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무가베 정권 하에서는 진실규명이 어려워 아직 공식적으로 제노사이드라 불리지는 않고 있다. 은데벨레 사람들을 학살한 이후인 1987년 무가베는 전략을 바꿔 ZAPU 정치인들을 ZANU-PF로 포섭하여 사실상의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은데벨레 댄서. Photo: Flickr / Julien Lagarde


1990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이 된 무가베는, 2000년엔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고 백인 소유의 땅을 정부가 압류할 수 있도록 하는 또 다른 개헌을 추진했지만, MDC (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 등의 반대에 부딪혀 국민투표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이는 ZANU-PF와 무가베의 첫 번째 패배였지만, 무가베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토지개혁을 추진한다. 


국민투표가 있었던 해에 "참전용사 (War Veterans)"라는 조직이 백인들의 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무가베 정권이 이들을 후원했다는 의혹이 있다. 이 "참전용사"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엔 짐바브웨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하기엔 너무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무가베는 이들의 행동을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대통령령을 통해 정부가 백인 소유의 토지를 보상 없이 몰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토지 침탈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는데 무가베는 사법부를 물갈이해서 판결을 번복시켰다.


토지개혁 이후 짐바브웨의 경제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2008년엔 실업률이 80%에 육박했고 사람들은 800억% 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초 인플레이션을 경험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짐바브웨를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당시 야당을 이끌던 Morgan Tsvangirai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8년 대선 1차 투표에서 Tsvangirai와 무가베가 각각 47.9%와 43.2%를 득표해 두 후보 다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결선투표를 하게 되었다. 무가베는 결선투표에서 질 것을 우려해 그의 "참전용사"들을 다시 풀었다. 2008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100여 명의 MDC 지지자들이 살해당했고, 2천 명 넘게 수감되었으며, 1만 명 이상이 폭행당했다. 결국 Tsvangirai는 후보에서 사퇴했다. 그는 무가베와 ZANU-PF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파티"를 비난하며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는 불가능해졌다고 말했다. 


어마어마한 액면가의 짐바브웨 지폐. Photo: Flickr / USAID Digital Development. Kay McGowan


그로부터 5년 후인 2013년에서도 무가베는 승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난 대선만큼의 유혈사태는 없었지만 광범위한 선거부정이 저질러졌을 것으로 의심되고 있다. 2013년 대선에서도 무가베와 맞붙은 Tsvangirai는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선거에 대해 "사람들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 다른 나라들에서조차 이렇게 뻔뻔하게 선거를 조작한 사례는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2018년까지 임기를 연장한 무가베는 90대가 되어서도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은퇴할 계획이 없다며 "신이 오라 하실 때까지" 정치를 할 것이고 2018년 대선에도 출마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8년을 한달 남짓 앞둔 2017년 11월 15일, 그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군부는 쿠데타 직후 성명에서 대통령을 지키고, 대통령 주변의 사회 경제 불안을 책동한 '범죄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군부가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짐바브웨 정치 2인자였던 부통령 에머슨 음난가과가 해임되고 영부인 그레이스 무가베가 차기 대통령의 강력한 후보로 올라선 것에 대한 불만이 쿠데타의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가택연금 이후에도 무가베는 사임 발표는커녕 최근 사태 수습을 위한 여당 전당대회를 주관하겠다고 말했는데, 의회가 탄핵절차를 시작하자 그제서야 서면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군부가 정부를 장악한 지 일주일 만인 2017년 11월 21일, 무가베의 37년 독재가 끝났다. 그리고 여당 ZANU-PF는 해임당했던 부통령 음난가과를 무가베의 남은 임기를 채울 대통령으로 지명했고, 11월 24일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음난가과 대통령의 임기는 2018년 8월 21일까지이고, 7월 30일로 예정된 대선에 출마했다.


이 '평화로운 쿠데타'에 대해 로버트 무가베가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실권을 빼앗기게 되자 군부에 자신과 영부인을 함께 물러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진실을 알 수 없고, 확실한 것은 무가베가 민주화 운동이 아닌 쿠데타로 물러나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음난가과가 대통령이 되면서 짐바브웨의 민주화가 늦춰졌다는 것이다. 


'평화로운 쿠데타' 이후에도 무가베는 망명을 떠나지 않고 짐바브웨에 남아 종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퇴진 협상과정에서 기소 면제권을 얻어 그 어떠한 기소도 받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무가베는 퇴진당한 게 아니라 안정적인 노후 보장을 받으며 은퇴한 것 아닐까? 무가베의 망령이 이렇게 계속 떠도는데 다음주 있을 선거에서 짐바브웨 사람들은 희망을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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