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대면 국회
아직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한국 국회법이 2020년 12월 22일 자로 일부 개정되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비대면 회의(국회법 제73조 2. 원격영상회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정된 국회법에 따르면 국회 의장은 "제 1급 감염병의 확산 또는 천재지변 등으로 본회의가 정상적으로 개의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하여 본회의를 원격영상회의 방식으로 개의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제 1급 감염병"에는 코로나19를 포함한 신종감염병증후군, 에볼라바이러스병, 페스트, 탄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등 이름만 들어도 걱정되는 감염병들이 포함되어있다. (출처: 질병관리청 감염병포털)
국회법 제111조(표결의 참가와 의사변경의 금지)에는 "표결을 할 때 회의장에 있지 아니한 의원은 표결에 참가할 수 없다"라고 되어있지만, 신설된 73조 2항, 원격영상회의 관련 조항에 따라 국회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하여 비대면 회의를 개최하면 원격영상회의 시스템에 출석한 의원들은 표결에 참가할 수 있다. 이때 표결은 거수나 원격영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진행될 예정이라고 한다. 73조 2항의 세부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회법) 제73조의2(원격영상회의) ① 의장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2조제2호에 따른 제1급감염병의 확산 또는 천재지변 등으로 본회의가 정상적으로 개의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하여 본회의를 원격영상회의(의원이 동영상과 음성을 동시에 송수신하는 장치가 갖추어진 복수의 장소에 출석하여 진행하는 회의를 말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 방식으로 개의할 수 있다.
② 의장은 제76조제2항 및 제77조에도 불구하고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하여 제1항에 따른 본회의의 당일 의사일정을 작성하거나 변경한다.
③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과 합의한 경우에만 제1항에 따른 본회의에 상정된 안건을 표결할 수 있다.
④ 원격영상회의에 출석한 의원은 동일한 회의장에 출석한 것으로 보며, 제111조제1항에도 불구하고 표결에 참가할 수 있다.
⑤ 제1항에 따라 개의된 본회의에서의 표결은 제6항에 따른 원격영상회의시스템을 이용하여 제112조에 따라 실시한다. 다만,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거수로 표결할 수 있다.
⑥ 국회는 원격영상회의에 필요한 원격영상회의시스템을 운영하여야 한다.
⑦ 그 밖에 원격영상회의의 운영에 필요한 사항은 국회규칙으로 정한다.
[본조신설 2020.12.22.]
아직 이 조항에 따라 비대면 회의가 열렸다는 기사는 없고, 국회방송의 2021년 6월 기사 중에 원격영상회의 시연회를 가졌다는 기사가 있었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 국회는 지난해 5월부터 일찍이 비대면, 대면, 그리고 하이브리드(비대면과 대면 병행) 국회를 시행해오고 있는데, 2년이 다되어가도록 여전히 줌(Zoom)을 어색해하는 나처럼 남아공의 국회의원들도 조금은 서툴게 줌을 통한 의정활동을 해오고 있다.
코로나19 범유행이 시작되기 전, 남아공의 국회의원들은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있는 국회 건물에 직접 출석하여 위 사진과 같은 모습으로 본회의를 진행하거나, 소회의장에서 위원회별 회의를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래 사진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비대면, 혹은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회의와 의결을 하고 있다.
남아공의 국회 의장은 국회규칙에 따라 국회법에서 정하지 않는 만일에 사태가 일어나면 각 사태에 대한 규정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Unforeseen eventualities: The Speaker may give a ruling or frame a Rule in respect of any eventuality for which these Rules do not provide) 남아공 국회는 이 규정을 활용하여 국회 규정 위원회(Rules Committee)에서 세부 사항을 논의한 뒤 이 위원회가 비대면 회의를 위한 규정을 국회 의장에게 권고하고 국회 의장이 이를 공포하는 방식으로 비대면 회의가 진행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이 규정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비대면 회의에서도 헌법이 정하는 국회의원의 권한과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은 유지된다.
비대면 회의 시 정족수 충족과 의결을 위해 각 의원은 이메일을 통해 회의 링크를 받는다.
국회의원은 전자투표나 목소리를 통해 혹은 원내대표를 통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의원의 표만 투표로 간주되며 가능한 경우 투표 결과는 회의록에 기록된다. 의원은 자신의 표가 정확히 기록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비대면 회의에 대한 대중 참여와 접근은 참여/대의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비대면 회의는 가능한 한 생중계된다.
국회 사무총장, 허가된 공무원과 기술팀은 국회의 비대면 회의가 잘 진행되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책임이 있다.
표결 결과를 검증하기 위해 각 정당은 소속 의원의 서명이 들어간 투표를 정해진 시간 내 제공해야 한다. 이 자료는 전자적인 방법으로 제출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비대면 혹은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진행되는 모든 국회 일정은 대면으로 진행되는 일정과 똑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다만 그 방식이 비대면 혹은 원격으로 바뀐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표결에 있어 원격으로 1차 진행하고, 2차로 서명된 투표 자료를 제출하는 식으로 이중 검증하는 점이 조금 흥미로웠다. 사실 더 흥미로운 것은 실제 회의가 진행되는 모습이다. 평소 한국 국회 회의 장면도 안 보는데, 어쩌다 우연히 보게 된 남아공 국회 회의 영상은 한참을 봤다.
회의 영상에서 우선 흥미로웠던 점은 분위기다. 생각보다 활기찬(?) 분위기에서 물론 절차와 격식이 존재하지만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줌 회의다 보니 가끔씩 순서를 무시하고 갑자기 끼어드는 의원이 있어 의장이 음소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던지, 민감한 주제를 논의할 땐 언쟁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활발한 토론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그리고 분야별 위원회 회의에서는 PPT를 활용하여 안건을 발제하고 토론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남아공 언론 Daily Maverick은 내가 생각지 못한 점을 지적했는데, 유튜브에 실시간 업로드되는 하이브리드 회의가 도입되면서 각 의원들은 자신이 준비한 발언을 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다른 참석자들의 발언을 감시하고 책무성을 높일 수 있는 질문을 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Daily Maverick은 남아공 의원들은 줌이란 무대에 선 배우들 같다고 비판했다. 국회의 비대면 회의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이후 유튜브 채널 등에 업로드된다면 아무래도 "짤"이 많들어질 확률이 높아질 텐데, 그러면 인지도 높이기에 관심이 많은 의원들은 자신의 발언 기회를 논의를 진척시키는 것이 아닌 대중들의 관심을 더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흥미로운 점은 의원들의 패션과 줌 배경화면이다. 그 다양성으로 '무지개 나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남아공답게 의원들과 회의 참석자들은 대면 혹은 비대면 회의에서 다양한 복장을 입고 있었다. 온통 양복만 있는 한국 국회와는 달리 각 의원들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리고 많은 참석자들이 아마도 집에서 비대면 회의에 참석하다 보니 배경화면을 많이 설정해 두었는데, 각자 다양한 화면을 설정해 둔 것이 흥미로웠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줌 배경을 다양한 각도의 국회 건물 혹은 국기 등으로 해두었는데, 아마 줌 배경 설정에 대한 일정한 규정이 있는 듯하다. 작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당시 논의되던 주제는 청년의 날(Youth Day,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남부 아프리카 정착 유럽인들이 주로 쓰던 아프리칸스(Afrikaans)를 중학교 공식 언어로 지정하자 이에 반발한 아프리카 학생들이 저항한 1976년 소웨토 청년 봉기를 기리는 날이다)이었고, 진보계열 야당인 경제해방투사(Economic Freedom Fighters, EFF) 소속 날레디 치르와(Naledi Chirwa)의 발언 차례가 돌아왔을 때 소동이 시작되었다.
치르와 의원은 자신의 줌 배경화면을 소웨토 청년 봉기 사진으로 지정한 채 발언을 했는데, 이에 다른 의원이 비대면 회의 규정 위반이라며 회의를 주관하던 부의장에게 항의한 것이다. 그 의원은 줌 배경화면은 국회 혹은 정당과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며, 저렇게 그 외의 사진을 허용하게 되면 질서가 흐트러질 것이라며 시정요청을 했고, 부의장은 이를 받아들여 치르와 의원에게 배경화면을 바꿀 것을 명령했다. 이에 치르와 의원과 EFF당 의원들이 모두 마이크를 켜고 반발했고, 부의장 레체사 트세노리(Lechesa Tsenoli)도 강경하게 맞서며 설전이 이어졌다.
하필이면 치르와 의원의 배경화면을 지적한 의원이 백인이었던 터라 EFF당 의원들은 부의장이 "백인 말만 너무 듣는다", "겁쟁이다", "인종차별이다"라는 비난과 함께, "청년의 날을 논의하는데 청년 봉기 사진을 쓴 것이 뭐가 문제냐", "저 사진은 국회에도 걸려있다"라는 주장도 펼쳤다. 하지만 트세노리 부의장은 물러서지 않고 "어린이처럼 행동한다", "같은 당 사람끼리 같은 이야길 반복하며 회의를 방해한다"라며, 나중에는 모두 음소거시키라고 사무처에 말하기도 했다. 설전 끝에 치르와 의원이 같은 배경화면 앞에서 다시 발언을 이어나갔고, 트세노리 부의장이 한번 더 명령해서 결국엔 의회 사진으로 배경을 바꾼 뒤 발언을 마쳤다.
이날 치르와 의원이 했던 발언은 1976년 소웨토에서 부당한 백인 정권에 저항하며 일어난 청년들을 기리며, 오늘날 청년의 고충을 덜기 위해 정부는 코로나19 봉쇄령을 완화하고, 청년 일자리를 보장하고, 여성 대상 성범죄 예방 및 생존자 회복 방안을 구축하고, 종교계와 전통문화 내 가부장 문화를 철폐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한국 국회에서도 대면 본회의에서 이미 의원들이 피켓을 내건 사례가 있어, 향후 비대면 회의에서 얼마든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배경화면 활용을 표현의 자유로 보아야 할지, 회의에 불필요한 혹은 방해되는 요소로 보아야 할지, 어떤 규정이 필요할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외에도 줌이 해킹당해 위원회 회의 중 화면에 포르노 사진을 띄우고, 위원장을 말로 모욕한 사건도 있어 보안에도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무튼 이렇게 우여곡절은 많지만 남아공의 국회는 코로나19 대유행이 왔다 갔다 반복되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안전한 방법으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앞으로 한국 국회도 '원격영상회의'를 본격 도입한다면, 남아공을 포함해 이렇게 미리 비대면 회의를 시행한 국가의 사례를 반드시 살펴 혼란이 없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남아공의 사례를 보며 이런 비대면 혹은 하이브리드 방식의 국회 운영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국회의 중요한 역할이 토의와 의결이라면, 비대면 방식으로도 충분히 논의하고 PPT와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해서 토론된 내용을 정리해나가며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회와 먼 곳의 지역구 의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동도 적어지면서 탄소 배출도 적어질 수 있을 것이란 조금은 희망 섞인 상상도 해보았다.
참고자료
국회방송. 국회 본회의도 비대면으로…“쉼 없는 국회”
https://www.natv.go.kr/natv/news/newsView.do?newsId=501415
The Parliament of the Republic of South Africa. Rules for Virtual Parliament Meetings
https://www.parliament.gov.za/press-releases/rules-virtual-parliament-meetings
Parliamentary Monitoring Group. Rule on Virtual meetings; Reconfiguration of Clustered System of Government Portfolios for Questions to Ministers
https://pmg.org.za/committee-meeting/30250/
The South African. Virtual Parliament, real mess: EFF MP’s Zoom background sparks chaos
PeaceFM. South Africa Parliament Virtual Meeting Hacked
https://www.peacefmonline.com/pages/local/news/202005/407715.php
Daily Maverick. After an acrimonious, pressure-cooker election, Covid-19 lockdown year – 2021, it’s a wrap
South African Government. Youth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