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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Jan 17. 2022

"번영 복음" 교회, 빈곤을 변명하다

기도하는 자는 가난해지고, 교회와 기업을 가진 자는 번영하리라

아프리카 몇몇 나라를 다니며 공통적으로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종교가 사람들의 삶과 생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이제 종교를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더 많고 20~30대에선 종교를 믿는 사람이 3분의 1도 안된다고 하는데(관련 갤럽 통계자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륙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은 (2010년 자료긴 하지만) 무려 97%라고 한다.(Pew Research Center 자료)


탄자니아나 르완다에서 지낼 때 "종교가 있느냐?"라는 질문이 아닌 "어느 신을 믿느냐"라는 질문을 받곤 해서 특이하단 생각을 했는데, 어쩌면 이들은 어떤 사람은 믿는 종교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회 살고 있기에 그런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금요일(이슬람), 토요일(제7일 안식교-르완다엔 안식교도가 꽤 많다), 일요일(가톨릭, 개신교) 등 각각의 종교의 예배일이 되면 평소보다 훨씬 좋은 옷을 입고 즐거운 표정으로 모스크나 성당,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도 이 날엔 최선의 복장으로 종교 모임에 참석하고 헌금을 한다. '교회 가는 날'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기도와 종교적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겉으로 보기엔 사람들의 삶에 종교는 정말 중요한 요소였고, 아마 많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도 종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프리카의 종교, 특히 아프리카 사람의 63% 정도가 믿는다는 기독교와 30%가 믿는다는 이슬람에 그 사회의 권력과 부가 모이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종교 행사에 자주 얼굴을 비췄고, 어떤 대통령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각 지역의 가톨릭 교구가 그 지역 부동산과 시장을 꽉 쥐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큰 스타디움에서 집회를 열 수 있을 만큼 인기 좋은 목사는 호화로운 집에 살며 비싼 외제차를 타고 다녔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은 모습일 것이다. 한국에선 기성 종교가 '사양사업'이 되어가는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일부 종파와 종교인들은 너무나도 큰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 언론인 Mail&Guardian은 정치비평 블로거인 안딜레 줄루(Andile Zulu)가 쓴 칼럼을 소개했다. 이 칼럼은 개신교의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이 아프리카의 빈곤과 그 원인을 위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그의 글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이 대륙에서 왜 소수의 사람들만 풍족한 부를 누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은 빈곤하게 지내는가? Christ Embassy의 지도자, 크리스 오야킬로메(Chris Oyakhilome) 목사(나이지리아의 유명 목사)는 아마 믿음은 곧 믿음을 잃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Enlightened Christian Gathering의 '예언자' 셰퍼드 부쉬리(말라위의 자칭 선지자)는 빈곤은 악마의 힘으로 오직 성령의 전쟁을 통해서만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라 말할 것이다.


줄루의 칼럼에 따르면, 이런 자칭 '신의 사람들'은 빈곤을 그 원인인 경제 체제와 정치 구조로부터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치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성경을 가지고 왔던 유럽의 선교사들처럼 종교를 교묘히 조작해 억압적인 권력을 추구하고 섬기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백만장자 목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부를 축적해나가는 동안,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로 인해 생겨난 불평등에 순응해간다.


이들은 개신교의 '번영 복음'을 도구삼아 이 불평등의 복음을 퍼뜨린다. '번영 복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 복종이 누군가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아주 좋은 건강과 남다른 부를 선사한다는 것인데, 줄루는 이를 단순히 비이성적이긴 하지만 크게 해 될 게 없는 신조로 보는 것은 순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빈곤과 불평등 같은 '사회적 전염병'을 해결하는 것은 어떻게 문제를 정의하느냐에 달려있는데, 빈곤을 초자연적 영역으로 연결시켜버린 '번영 복음' 목사들은 자신들의 신도가 처한 상황의 근본 원인을 속이고 정치의식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오야킬로메 목사의 기도회를 가득 채운 사람들. Photo: pastorchrisonline.org

줄루는 이어 번영 복음이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를 말한다. 이런 '번영 복음'은 경제 실패와 사회 불안정에서 생긴 절박함을 자양분 삼아 성공했다.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의 큰 스타디움에서 열린 크리스 오야킬로메 목사의 기도회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찰 때, 남아공은 부의 70%를 소득 상위 10%가 독점할 정도로 불평등과 빈곤이 만연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엔 절망과 절박함, 무기력함이 스며들어 있었고, 이런 무기력함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정치 행동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절박하고 무기력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진정한 예언자'로 포장한 번영 복음주의 목사들은 자신을 숭배하게 된 사람들을 착취했다. Jesus Dominion International의 팀 오모토소(Tim Oluseun Omotoso) 목사는 강간, 인신매매 등 63건에 달하는 죄목으로 감옥에 수감되어있다. '예언자' 부쉬리는 1억 달러 규모의 절도, 사기, 돈세탁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번영 복음은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무기력하고 침몰되어가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약속했지만, 공허한 약속일 뿐이었다. 번영 복음은 빈곤의 진짜 속성을 감춰 사람들이 진짜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번영 복음주의 목사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경제 정책을 펼치는 정치인을 비판하는 대신 자신의 신도들이 빈곤을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부족함을 꾸짖었다. 시장을 독점하는 다국적 기업을 비판하기보다는 각자의 경제적 성장을 위해 봉헌할 것을 권했다.


줄루는 이런 식으로 번영 복음은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으로 혹은 의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단정 지어 사람들이 교회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고,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위안을 찾는 동안 엘리트들은 다수 시민이 아닌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더 추구하며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며 칼럼을 마쳤다.

전문 읽기: https://mg.co.za/africa/2022-01-13-the-prosperity-gospel-excuses-poverty-and-its-true-causes-in-africa/


줄루의 칼럼을 읽으며 한국 사회의 많은 극우 기독교 목사들과 수상쩍은 신흥 종교, 그리고 한국에서 아프리카로 진출한 수상쩍은 기독교 교파들이 떠올랐다.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방식도 줄루가 그린 남아공과 아프리카의 번영 복음주의 목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힘없는 사람들을 더 힘없게 만드는 역할을 이들이 하고 있다.


모든 교회, 종교가 번영 복음처럼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유지하며 자신의 배만 불리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 있는 종교는 오래전부터 많은 사회 운동의 시발점이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이자 독실한 기독교인, 그리고 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1967년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침 오늘(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다.


교회는 교회가 국가의 주인 혹은 종이 아닌 국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야만 합니다. 교회는 국가를 안내하고 비판해야지, 절대 도구가 되어선 안됩니다. 만약 교회가 그 선지적 열의를 다시금 일깨우지 못한다면, 교회는 도덕적이거나 영적인 권위도 없는 무의미한 사교 모임이 될 것입니다. (Knock at Midnight Speech - 1967, Mt. Zion Baptist Church, Cincinnati


오늘날의 교회가 국가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지, 극우주의 권력자들의 종이 되려고 하는지, 혹은 어디선가는 국가의 양심으로서 역할하고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있는지에 대해선 나보다 아마 기독교인들이 더 잘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나는 진보정치와 시민사회의 실패에 대해 생각한다. 차별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진보정치와 시민사회가 아닌 수상쩍은 교회를 찾았다. 정치와 사회에 이들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품을 공간이 있었다면 그 수상쩍고 비이성적인 번영 복음 '산업'은 절대 번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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