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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Mar 18. 2023

 '발전'을 넘어 현실을 생각하기

아르투로 에스코바르와 탈발전(Post-development)

얼마 전 대학원에서의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고, 내가 속한 학과가 학제간(interdisciplinary)접근을 넘어 탈학제적(transdisciplinary)접근을 추구해서 그런지, 그냥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많아서 그런지, 다양한 배경의 교수님들이 제시하는 각양각색의 논문들을 읽으며 허덕거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학기엔 수업도 수업이지만, 어쨌든 논문 주제를 구체적으로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아 따로 관심 있는 글들을 훑어보고 있는데,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플루리버스>의 저자 아르투로 에스코바르(Arturo Escobar)의 1987년 박사 학위 논문 <권력과 가시성: 제3세계에서의 발전의 발명과 관리>의 서문에서 그의 기개(?)도 느껴지고 공감도 아주 많이 되는 글을 만났다. 


아르투로 에스코바르의 박사 논문 표지. '발전 철학, 정책과 계획'이라는 전공명이 흥미롭다.


"실제로 '개발'에서 벗어나 다른 용어로 생각하고 현실을 다르게 개념화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어디를 보아도 바쁘고 반복적이며 어디에나 있는 개발의 현실만을 볼 수 있었다: 야심 찬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정부, 시골과 도시에서 개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관, 저개발을 연구하고 각 문제마다, 각 정책의 작은 부분마다 지겹도록 이론을 만들어내는 전문가들, 최신 접근법을 자랑하고 최신 이론을 활용한 '시범 사업'들, 여기저기의 외국인 전문가들, 개발의 이름으로 들어온 다국적 기업들, 끝없는 숫자의 국제개발기관들이 제3세계에 쏟아붓는 수십억 달러" 

"이런 와중에 하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발전의 필요에 대해 왜 그리도 법석인 것인지, 왜 그리도 많이 이야기하는지, 왜 그렇게나 집착하고 불안해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상태가 실제로 나아지지 않았고 되려 악화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현실은 같은 것으로 가득 찼고, 개발은 현실을 식민화해 현실이 되었다. (...) 다른 쪽은 없고, 벗어날 수 없는 내부만 있다. 우리는 희박한 공기를 마시며 이 안에서 다른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조금씩 자유를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 아르투로 에스코바르 


1987년 출간된 논문이지만, 에스코바르가 국제개발협력 업계(?)를 묘사하는 부분은 마치 오늘 쓴 것처럼 생생했고, 뒤이어 이어지는 발전을 넘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민에는 깊이 공감하면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혹은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 발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재확인하며 놀랐다. 


물론 에스코바르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다른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의 결실 중 하나가 그의 신간 <플루리버스>에 담겨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곧....)


아르투로 에스코바르의 <플루리버스>. 원서는 2016년 나왔고, 한국어 번역은 2022년 되었다.


모든 '탈'- 논의 들이 그렇듯, '탈발전' 접근에 대해서도 하나의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탈발전 이론가로 분류되는 사람들도 스스로 그렇게 분류했다기보다는 나중에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경우도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오해만 짚고 넘어가자면, 탈발전 이론가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과거 있었던 발전을 위한 시도들을 실패로 보는 경향은 있을지 몰라도 모두가 '반-발전'론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이해하는 '탈발전' 접근은 '발전'이라는 생각과 거기서 파생된 다양한 개념들(빈곤, 저발전, 역량강화 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생각들이 탄생한 가정과 철학,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다. 그렇게 '발전'을 문제화하며 누군가는 이미 '오염'되고 현실과 멀어진 '발전'이란 개념 대신 더 나은 개념을 찾자고 이야기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하나의 발전이 아닌 여러 발전, 진보,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에스코바르도 언급했듯, 탈발전 이론을 전개하고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 세상에는 '지속가능발전', '빈곤종식', '선진국 진입'과 같은 말, 특정한 '발전'이란 생각이 여전히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발전'은 어째서 한국에서도, 르완다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탄자니아에서도, 국가와 시민 모두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발전에 끝엔(끝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꼭 발전해야 하는 것일까? 


식민지배와 산업화 이후 오늘까지의 역사는 정말 거칠게 표현하자면(혹은 그저 내가 익숙한 내용으로 표현하자면) '발전'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후위기와 극단적이고 비인간적인 양극화다. 에스코바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다른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발전'에 도전하고 있고, 우리는 더 많이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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