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바리 Aug 20. 2018

'아프리카의 자랑스러운 아들' 코피 아난, 떠나다

故 코피 아난 전 UN사무총장과 아프리카

UN 최초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사무총장이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코피 아난(Kofi Annan)이 짧은 투병 뒤 어제(8월 18일),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9년 우리를 떠났던 날과 같은 날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아난이 UN 그 자체였고, "자랑스러운 아프리카의 아들로 태어나, 평화와 인류를 위해 싸우는 세계적 투사가 되었다"라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아프리카의 자랑스러운 아들', 코피 아난을 기리며 그와 아프리카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코피 아난 별세 관련 기사: http://www.hankookilbo.com/v/4de34867428d46d091178ff64cb22c7b


2012년 7월, 시리아 상황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는 코피 아난 당시 UN 특사. Photo: Flickr / UN Geneva (Jean-Marc Ferré)


UN 그 자체, 코피 아난


코피 아난은 1938년 가나 (당시 영국 식민지 골드 코스트)의 쿠마시에서 태어났다. 미국과 스위스에서 공부를 마친 아난은 1962년 UN 산하 세계 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의 예산담당자로 취업한 뒤 1974-76년 잠시 가나의 국영 관광회사에서 일한 것을 빼곤 계속 UN에서 일해왔다. 유엔 난민기구(UNHCR)와 사무국에서 경력을 쌓은 아난은 1993년 평화유지활동국 (Department of Peacekeeping Operations) 사무차장을 거쳐 1997년엔 59세의 나이로 UN의 7번째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최초의 UN직원 출신 사무총장이자 최초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 사무총장이다. 2001년, 그는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UN과 공동으로 수상했고, 2006년, 두 번째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은 사무총장은 반기문 전 사무총장이다.


은퇴 1년 뒤, 아난은 자신의 이름을 딴 코피 아난 재단을 설립하고, 세계평화와 발전, 인권을 위한 정치적 뜻을 모으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넬슨 만델라가 창립한 엘더스(The Elders)라는 국제 자문단체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아난이 이끌던 엘더스는 지난 4월 청와대에 서한을 보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문재인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코피 아난과 아프리카


코피 아난은 르완다 제노사이드,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이라크 전쟁 등 최악의 국제분쟁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실패에서 배우고, 실패를 반성하고, 사과했기 때문이다.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 당시 코피 아난은 UN의 평화유지활동국의 사무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노사이드의 위험이 커져가는 상황에서도 UN 안전 보장 이사회는 평화유지군 추가 파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현장의 UNAMIR(United Nations Assistance Mission for Rwanda) 병력은 상황을 통제하기에 역부족인 데다가 적극적인 개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외면 아래 8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바로 다음 해, 보스니아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다. 코피 아난이 사무총장이 된 이후인 1999년, 르완다 제노사이드 당시 UN의 역할에 대한 진상조사가 있었고, 조사단은 르완다 UN이 르완다 제노사이드 방지에 실패했고 그 책임은 사무총장, 안전 보장 이사회, UNAMIR 등에 있다고 명시했다.


코피 아난은 UN의 실패,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였다.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아난은 "우리 모두는 제노사이드를 막기 위해 뭔가 더 하지 않았다는 것을 통렬히 뉘우쳐야만 합니다."라며 "UN을 대표하여 저는 이 실패를 인정하고, 저의 깊은 후회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2004년 제노사이드 10주기에 뉴욕에서 열린 행사에 참여해서 "만약 국제사회가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결단했다면 대부분의 학살을 멈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의지도 없었고, 군대도 없었습니다", "국제사회는 태만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UN의 평화유지활동국 책임자로서, 많은 나라들에게 파병을 요구했었습니다. 당시 저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노사이드 이후, 경보음을 울리고 지원을 끌어모으기 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것을 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더불어 이 고통스러운 기억은 사무총장으로서의 제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경력엔 참담한 실패도 있지만, 성공이라 부를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사무총장에 취임한 코피 아난은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인도주의적 개입'을 도입해 각지의 분쟁 예방에 기여했다. 그리고 유엔 사무국 조직을 축소 개편했고, 2000년 발표한 새천년개발목표는 빈곤과 아동 사망률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이끌던 시절의 UN은 아프리카의 평화에도 기여했다. 1998년부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국경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2000년에 알제리와 UN 등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양국은 "군사적 적대행위를 영구적으로 종식한다"는 협정에 서명했다. 아난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가 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이것은 아프리카를 위한 긍정적인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한 적 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최종적으로 적용되지 못했고, 분쟁은 계속되었으며 2018년, 양국 정상이 다시 만나 평화협정을 맺었다. 2006년에는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의 석유 매장 지대를 둘러싼 해묵은 분쟁을 중재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아난은 사무총장에서 물러나면서 아프리카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2008년, 아프리카연합의 요청으로 그는 선거 후 폭력사태를 겪던 케냐 나이로비에 도착했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으며 폭력사태를 멈추고 여야의 공동정부 구성을 골자로 하는 합의를 성사시켰다. 당시 야당 후보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던 라일라 오딩가(Raila Odinga)는 페이스북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라일라 오딩가 페이스북 화면 캡쳐.


아프리카연합(AU)의 의장 무사 파키 마하마트(Moussa Faki Mahamat)는 추모 성명에서 아난이 아프리카연합과 국제연합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는데 힘썼다는 점을 언급했다. 10년 기한의 아프리카연합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이끌었고, 다르푸르 분쟁에서 아프리카연합과 국제연합의 평화유지군이 함께 활동하는 하이브리드 작전을 만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굴하지 않는 낙관주의자


코피 아난은 세계 사람들은 한 배를 탄 운명공동체이며, 따라서 공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공평하고 안정적이고 개개인의 욕구가 충족되는 세상을 위해 평생을 일했다. (코피 아난 "The world I'm working to create":  https://youtu.be/m6rqlhOJa8E)


그는 언제나 희망을 찾는 낙관론자고 이상주의자였지만, 국제정치의 현실은 그의 실력과 낙관론으로도 이겨낼 수 없을 만큼 냉혹했다. 그가 막지 못한 일들이 많다. 하지만,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어두웠을 것이다.



표지 사진: 2015년 Africa Forum에서 발언하는 코피 아난. Photo: Flickr / OECD Development Centre (Thomas Eck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