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바리 Aug 21. 2018

나의 첫 페미니즘 책

[책 리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2014/2016)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Chimamanda Ngozi Adichie)가 2012년 영국에서의 한 TED 강연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발표한 것을 책으로 옮긴 에세이이다. (TED 영상: https://www.ted.com/talks/chimamanda_ngozi_adichie_we_should_all_be_feminists)


이 책은 영문판 기준 65페이지로, 아주 짧고, 얇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쉬운'책이다. 나는 이 책을 2016년 6월, 영국에서 읽었다. 내가 영문으로 읽은 책 중 가장 즐거운 독서경험을 선사해줬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첫 번째 페미니즘 책이다. 


2016년 중순, 내가 이 책을 만난 당시는 '메갈리아'의 등장으로 '페미니즘'과 '여성혐오'가 열린 공간에서 언급되기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혐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나는 내가 이 모든 문제의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삼 깨달았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계속 이렇게 살면 인간 노릇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함께 낄낄거렸고, 차별했고, 혐오했다.


내가 공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페미니즘이나 젠더에 관련된 책들을 읽어보려 했었는데 그때 살던 장소가 영국이라 읽을 수 있는 책들이 영어였을 뿐 아니라, 내용 자체도 엄청 어려워서 첫 번째 챕터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당시 읽어보려 했던 책은 젠더 관련 개론서나 주디스 버틀러의 Gender Trouble, 톰 딕비가 엮은 Men Doing Feminism 등이다. 그 어느 책도 반 이상 읽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원래 아프리카 덕후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를 알고 있었다. 그의 단편집 「숨통」(The things around your neck)을 몇 해 전에 재밌게 읽었었고, 그의 TED 강연 중 하나인 "The danger of a single story"도 흥미롭게 봤었다. 그런데 그가낸 페미니즘 책도 있다고 해서, 아마존을 통해서 한 권 샀다. 앞서 언급한, 읽으려다 실패한 책들에 비해 아디치의 We Should All Be Feminists는 정말 쉬웠다. 마치 조금 더 일찍 페미니즘을 접한 친구가 나에게 '영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젠더 문제들을 예를 들어가며 차근차근 설명해 준다. 친숙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엄청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아디치가 주로 나이지리아와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이 그 두 나라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예로 드는데,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사례다. 


Recently a young women was gang-raped in a university in Nigeria, and the response of many young Nigerians, both male and female, was something like this: 'Yes, rape is wrong, but what is a girl doing in a room with four boys?'

최근 나이지리아의 한 대학에서 젊은 여성이 집단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젊은 나이지리아 남녀의 반응은 이런식이었어요. '그래, 강간은 나쁘지, 근데 그 여자애는 네 명의 남자애들과 그 방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한국에서 성범죄자에 감정 이입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일상에 가깝다. 최근엔 안희정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판사가 그런 부류에 해당하겠다.



아디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디치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며 페미니스트는 '시집을 못 가서 불행하고, 서양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고, 남자를 혐오하는 여성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참견에 아디치는 스스로를 '행복하고, 남자를 혐오하지 않는, 그리고 남자가 아닌 자신을 위해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신는 것을 좋아하는 아프리카인 페미니스트 a  Happy African Feminist Who Does Not Hate Men And Who Likes To Wear Lip Gloss And High Heels For Herself And Not For Men '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세상은 어떻게든 페미니스트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들은 이 착취적 구조를 계속 누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what it shows is how that word feminist is so heavy with baggage, negative baggage: you hate men, you hate bras, you hate African culture, you think women should always be in charge, you don't wear make-ups, you don't shave, you're always angry, you don't have a sense of humour, you don't use deodorant.

이런 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느냐는 것이에요.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혐오하고, 브래지어를 혐오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혐오하고, 여성이 언제나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화장도 안 하고, 제모도 안 하고, 항상 화가 나있고, 유머감각도 없고, 데오드란트도 안 쓴다고 생각해요.


이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페미니스트와 꾸밈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약간 차원이 복잡하다.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해 여성혐오자들이 이런 공격을 하기도 하지만,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코르셋'과 관련해서 유사한 공방이 오간다. 예전에 영화배우 엠마 왓슨이 신체를 노출하는 화보를 찍고서 페미니즘 진영의 집중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지 다른 여성을 때리는 도구가 아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 Photo: Flickr / Howard Country Library System


젠더 문제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문제와도 많이 관련되어있다. 회사에서 높은 직책일수록 여성이 적고, 부부 사이에서도 집안일은 여성의 의무로 되어있고, 어린 시절 아디치의 경험처럼 학교에서도 반장은 남자애들이 도맡아 하는 등의 불평등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디치는 한국 사회에서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사례를 제시한다.


I know a woman who has the same degree and same job as her husband.  When they get back from work, she does most of the housework, which is  true for many marriages, but what struck me was that whenever he changed  the baby's nappy, she said thank you to him.
 
나는 남편과 같은 학력에, 같은 직업을 가진 한 여성을 알고 있어요. 그 부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여느 부부와 똑같이 여자가 집안일을 해요, 하지만 제가 정말 놀랐던 것은 남편이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그 여성이 '고맙다'라고 했다는  것이었어요. 


일상 대화에서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고, 또 나도 모르게 그런 표현을 하게 된다. TV 프로그램 '안녕하세요'에 나오는 수많은 이상한 남편들에게 MC들은 한 목소리로 집안일을 좀 '도와 주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조그만 생각해보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건데 왜 도와준다고 했을까? 굉장히 이상하다. 여성 차별적인 문화는 이렇게도 강하고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옛날에 동생이 일본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했다가 탈락한 적이 있다. 내 동생은 일본어를 엄청 잘하고, 회사생활 경력도 꽤 있어서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는 그냥 뽑긴가보다 했는데, 소문인지 공식적인 건지, 동생은 성매매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 20대 후반 여성들에겐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잘 주지 않아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미국 비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당시엔 그런가 보다, 안타깝네 하고 넘어갔는데, 아디치가 오래전 호텔에 혼자 묵게 되면서 겪은 일화를 읽고 나선 뒤늦게 화가 났다.


오래전 아디치는 혼자 나이지리아의 한 호텔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경비원이 입구에서 이름은 뭔지, 방 번호는 뭔지, 누굴 만나러 온 건지 등등을 캐물으며 귀찮게 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사이 다른 남성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입구를 통과했다. 당시 나이지리아에선 혼자 호텔에 들어가는 여성들은 성매매를 하러 온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한다. 그 외의 다른 여성들은 혼자 호텔방을 잡을 경제적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디치는 이렇게 묻는다.


Why, by the way, do those hotels not focus on the demand for sex workers instead of on the ostensible supply?

왜 이 호텔들은 성매매에 대한 수요는 생각하지 않고 표면적인 공급만 생각했을까요?


과거 나이지리아의 호텔에서 일어나던 일은 지금 전 세계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여성들은 이런 식으로 '잠재적 매춘부' 취급을  받으며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갈 '이동과 거주 자유'를 제약받고 있다. 그들을 막는 일본 정부나 미국 정부가 '수요'문제에  대해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하다.


젠더의 문제는 어디에나 있다. 아디치는 더 나은 세상, 더 행복한 남성과 더 행복한 여성들이 사는 세상을 위해선 우리의 아이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길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떻게 해야 호감을 얻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듣는다고 한다.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반대 의견이 있어도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공격적으로 굴지 말아야 한다' 등을 들으며 여자아이들은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닌, 사회가 바라는 '여성', 순종적인 여성으로 길러진다.


남자아이들도 잘못 길러지고 있다. 아디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남자아이들의 인간성(Humanity)을 억누르'고 있다. '우리는 남성성(Masculinity)을 너무나도 좁은 의미로 정의하고, 그 단단하고 작은 우리에 남자아이들을 가두'고  있다.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고, 두려워해선 안되고, 여성을 지켜야 하고, 남녀관계에서 물질적인 부분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남성성'이 남자아이들의 자아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남자아이들은  결국 그 아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여자아이들에게 해가 된다.



젠더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고, 변화를 원하면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데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아디치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페미니스트죠? 인권운동가 같은 거라고 할 수는 없었나요?" 이에 아디치는 "물론 페미니즘은 인권의 한 부분이에요. 하지만 인권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와 관련한 특수한 문제들을 감추는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젠더 문제는 보이지 않는 배제와 억압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렇기에 그에 대한 해결책은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디치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제시한다.


My own definition of a feminist is a man or a woman who says, 'Yes,  there's a problem with gender as it is today and we must fix it, we must  do better.' All of us, women and men, must do better.

페미니스트에 대한 나의 정의는 남자든 여자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 오늘날에도 젠더에 대한 문제들이 있어, 우리는 이걸 고쳐야만 해, 우리는 더 나아져야 해.' 우리 모두, 남자와 여자, 모두 더 나아져야 합니다.



한글 번역판 기준, 만원이 채 안 되는 저렴하고 얇고 쉬운 책이다. 혹시 젠더 문제에 대해 도통 이해를 못하는 친구나 자라나는 어린 자녀나 조카에게 이 책을 선물하면 참 좋을 것 같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