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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Oct 09. 2019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책 리뷰]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019)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말하고 싶은데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그런 말을 대신해주는 사람이나 글을 만나면 기분이 참 좋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완전 노다지이면서도, 'OOO이 차별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안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저 말줄임표 뒤로 행동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나에게 실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저자 김지혜 교수는 대학교 다문화학과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에 관해 가르치고 연구하던 자신이 어느 날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결정장애'라는 표현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표현임을 깨닫고, '내가 차별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라는 충격에 빠져 연구를 하고 책까지 냈다. 그런데 책을 내면서도 저자는 "차별에 관한 책을 한 권 마치는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차별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는 이 과정이 나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값지다는 것은 분명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 같으면 '아 X팔리네',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었어! 나도 장애인 좋아해'라고 둘러 댓을 상황에서 그는 부끄러움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멋지게 승화시켰다. 아주 집요하면서도 멋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2019. pp.243.


여성 혐오 범죄, 예멘 난민, 노조 파업 등등에 대한 기사와 그 댓글을 보면서, 왜 상대적으로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다수에 속하면서도 소수를 혐오하고 차별하고, 심지어는 그들보다 자신이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그냥 그들이 대화불능의 악의에 가득 찬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사실 책을 읽은 뒤인 지금도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만(나에겐 아쉽게도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해보려 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역설의 논리를 읽고 나서는 이들과 다시 대화를 해보고 설득을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약간 생겼고, 나도 어느 점에선 그들과 다를게 별로 없을 수 있다는 새삼스런 반성을 하기도 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는 우리 사회의 온갖 논쟁거리가 다 담겨있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부터 코미디언들의 블랙페이스(흑인 분장, 최근 캐나다 트뤼도 총리는 학창 시절의 블랙페이스로 엄청 질타받았을 정도로 큰일인데, 한국에서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학벌주의, 그리고 김치녀와 한남충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슈가 이슈이니만큼, 이런 주제들을 다룬 글들은 이미 많고, 많은 글들은 '사이다'처럼 시원한 비판을 날리곤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찬찬히 음미하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따듯한 커피와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어 이런 뜨거운 이슈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도 그 현상 자체에 대해 분노하거나 기분상하는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아주 평화로운 글쓰기와 갈등 접근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민과 더불어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다른 이를 차별하지 않기 위해선 어떤 표현들을 피하겠다와 더불어, 다른 이가 차별적 발언을 할 때 이렇게 하겠다라고도 다짐했다. 얼마 전 중년 남성을 한 명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매우 차별적인 이야기를 유머랍시고 해서 굉장히 불편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굳이 그의 발언을 지적해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용기 혹은 의욕은 없어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2부가 시작할 때쯤 그냥 잠시 나가버렸다. 책의 4장, 제목만 들어도 내용을 알 것 같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에서는 이런 불편한 농담이 가진 속성, 힘과 영향력, 그리고 가장 최소한의 반대의사 표현법이 나온다. 나는 아직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기보다는 책에서 말하는 최소한의 반대인 '무표정'하기 정도는 하기로 다짐했다. 그동안 나는 그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러고 보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표현은 어떤 지원이나 후원을 받는 사람들에게 쓸 말이 아니라 딱 이렇게 남을 비하하고 조롱하는걸 유머랍시고 하는 이들에게 어울린다. 그들의 혐오발언 차별 발언에, 그가 누구이건 간에 웃어주는 호의를 베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죽자고 달려'드는 건 조금 더 단단해진 뒤로 미루었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차별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한 가지 방안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소개한다. 차별금지법은 이미 우리 헌법에 정해진 차별금지의 원칙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률로 구체화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갈길이 멀기만 하다.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으며(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성소수자에게 아픔을 드려 송구하다며 사과를 했고, 동성애는 허용하고 말고 하는 찬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뒤, 토론회에서의 발언은 군대 내 동성애를 찬성하지 않는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그 뒤로 '개인 선호도 표현 못하냐'라며 그를 옹호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고, 인권과 차별 금지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면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극단주의 종교 단체가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나는 지난 대통령 대통령 선거 기간에 당시 문재인 후보의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싫어하는 감정을 표현할 자유도 없냐'라는 댓글이 달렸던 적이 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중략)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재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p.143)하기에 그는 개인의 차원에서 말했을지라도 결론적으로는 수많은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차별의 구조를 더 강화했다. 그리고 더 많은 성소수자 혐오자들이 더 당당하게 난 성소수자가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이성애가 '정상'과 '보통'으로 자리 잡은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위협적이라며 그들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야기하는 위협이 실재하는지 여부와 별개로,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그런 말을 해도 직접적인 위해가 없을 정도의 권력을 가졌고, 이성애자이므로 상대적으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그런 그들의 '감정표현'은 누군가를 차별하는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여성 혐오, 난민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가 지금은 상당히 가시화된 것과 달리,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에 아주 교묘한 형태로 뿌리내리고 있는 차별의 기재이다. 능력주의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Shanon K. McCoy와 Brenda Major의 논문에 나오는 정의)을 뜻하는데, 이 이야기를 다루는 5장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을 읽을 땐 지금도 한창 논란 속에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이 떠올랐다. 조국 장관이 그 자리에 적합한지 여부를 자녀와 관련해서 문제 삼는 건 매우 부적절하지만, 이번 논란을 통해서 우리 사회엔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의 재생산이 '능력'과 평가 가능한 '능력'으로써의 '스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능력'과 '노력'이 사실은 불공평한 기준이라는 사실이 일부 수면 위로 올라오긴 했다고 생각한다. 노력하고 능력을 갖추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라기엔 노력을 하고 능력을 쌓고, 스펙을 갖출 수 있는 조건과 기회가 사람들마다 너무나도 다른 지금 이 체제에서의 능력주의는 승자들에게는 어떤 차별은 공정하다는 생각을, 패자들에게는 사람들에게 패배감과 '받을만하니까 받은' 차별의 경험만 심어준다. 조국 장관 본인도 자녀 교육과 진학에서 본인의 지위와 여건에 따른 혜택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고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고 한 만큼, 이 논의는 조국 법무부 장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상위 계급, 엘리트 사회 전반의 계급 재생산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더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지금 서초와 광화문으로 나눠져 줄다리기하는 상황에선 중요한 건 다 증발하고 결국 '조국' 개인만 남아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평등한 사회는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문화와 가치가 바뀌어야 가능하다. 저자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차이'의 재정의를 주장한 아이리스 영의 논의를 소개한다. 아이리스 영은 차이를 "주류 집단의 입장을 보편적이라고 보면서 비주류만을 다르다고 표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관계적으로 이해해 상대화 하는 것"으로 재정의하자며, 차이의 유동성을 강조하는 해석을 내놓는다. 이 부분을 읽으니 이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짐 아이프라는 학자가 「아래로부터의 인권」(2010)이란 책에서 인간이 공유하는 것은 ‘다름’뿐이라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길 했던 게 생각이 났다. 듣고 보니 우리 모두가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공통점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짐 아이프는 공통성과 그 양면인 차별에 기반한 공동체는 생존 가능성이 없고,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도 높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차이를 포용하는 것이 평등한 사회 문화를 형성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차이에 대한 포용력이 너무 낮고, 많은 사람들이 주류에 진입하여 '차별받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노력을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길 것을 제안한다. 


많은 이들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을 행하는 것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다. 예를 들어 자신은 악의 없이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세요"라고 하고, 이주민에게 "한국인 다 되었나요"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그런 표현은 차별적이라고 지적받으니 무슨 말을 못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저자는 사람들에겐 "평등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변화에 불편한 마음이 앞선다"며, 그렇다면 "현재의 불평등은 우리에게 편안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주류에 편입되어 "차별받지 않기 위해 하는 노력"이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보다 쉬운 것인지, 나아가 더 평등해진 사회에서의 삶이 지금의 삶보다 더 불편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아주 흥미롭고 설득력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 분명 더 불편해진다. 내가 가하고 있는 차별과 나도 모르게 당하고 있던 차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차별과 혐오의 문제가 지금보다도 더 극단적이고 물리적인 형태로 사람과 사회에 해를 끼치게 될 시대가 곧 올 거라고 생각하기에 지금부터라도 더 배우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노력에 더 많은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교양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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